단식(2/11)

2005. 2. 11. 오후 10: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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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오늘 복음은 우리의 단식이 예수님과 연관되어야 올바른 단식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다윗이 바쎄바가 낳은 아들이 중병에 걸리자 단식을 시작한 것을 보면 구약의 단식은 수덕 차원보다는 고통의 표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도 공생활 시작 전 40일 동안 단식하셨는데 이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것과 같은 의미겠지요.
바오로 사도 역시 육체를 초월하는 더 깊은 의미의 단식을 강조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라는 권고입니다. 음식으로 대변되는 욕구를 거절할 때 오는 것은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욕구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면 그만큼 삶은 기쁨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절제함으로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단식의 참된 의미겠지요. 단순히 음식을 적게 먹거나 안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랑과 함께한다면 단식도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이는 또한 단식을 하는 이에게 결연한 의지가 드러나는 이유입니다. 단식은 작은 죽음입니다. 먹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선 약해집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약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넘어설 때,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럴 때 사람은 의연해집니다.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먹고 싶은데 안 먹는 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이것이 단식입니다.
이제야 나를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초대에 내가 드릴 수 있는 응답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하는 사순시기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 하면 안 되는 것에 집중을 하느라고 고역스러워 매번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단식을 하고도 죽음을 뛰어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강희수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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