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2008. 12. 14. 오전 12:07:11

글자
 
마지막 잎새
 
신학교의 단풍과 낙엽이 보기 좋아서 작년 가을에 카메라에 담았던 풍경을
올해 여름방학 때 올리는 바람에 건망증과 게으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으니...
에궁, 이번에는 제대로 찍어서 올려보자고 다짐했겄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만추가 지나 초겨울의 문턱에 다달아서야 부랴부랴 카메라를 챙겻으니...
그것도 11월 중순이 지나 찬 바람이 매섭게 불던 어느날...
오늘이 지나면 잎새가 다 질 테니 그 다짐이 허사가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갑자기 찬 바람이 부니까  산책하는 학우들이 안 보여서
홀로 사진 찍기는 좋은 반면에 심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주교관의 강아지가 외로운 찍사를 보고 줄레줄레 따라오는 게 아닌가...
"그래, 증명사진 한번 찍어보자!"...
 
주교관을 지나 '묵상의 길'에 접어 들자 마지막 각혈을 토하듯
선홍빛을 띤 단풍이 게으른 찍사에게 그 자태를 뽐낸다...
 
빈 의자 
 "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되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드리리다"
70년 대 말 장재남이 불렀던 곡인데...
"아, 빈 의자처럼 남에게 편하게 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
이 곳에서 묵상을 하며 사목자의 길을 걷게 되는 사제들은
그런 분들이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낙산성 틈새에 걸려 있는 '마지막 잎새'...
세찬 마람이 불고 있는데 저렇게 버티고 있기가 어디 쉬운 일입니까?
실은 제가 아래 굴러 다니던 잎새 하나를 올려 놓고 찍은 거랍니다...ㅎ
O. Henry의 '마지막 잎새'가 떠올라서...
'마지막 잎새'를 그려 폐렴에 걸린 잔시를 살려내고
정작 자신이 죽은  베어만 노인이 생각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라는
루카복음(13,24)이 생각나서...
저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는 힘든 것 같구요...

 
그동안 저는 이렇게 넓고 훤한 문으로 다니길 좋아했으니까요...
밑엔 푹신한 보료처럼 낙엽이 쌓여있는 길...
 
 
홀로 산책을 나오신 유펠리치타스 수녀님의 검은 수녀복과 노란 은행잎 카페트와의 조화...
증명사진 잘 접수하세요~... 
 
 
우리에게 강의를 해주셨던 신부님들이 이런 곳에서 사목과 연구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하셨듯이 우리에게 좋은 강의를 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켜켜이 신앙과 이성, 교리지식을 쌓았건만...
공든 탑이 무너지듯 쌓였던 지식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바람에
하산을 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니... 
 
어차피 삶은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도 있을 것이며...
 
때 아니게 피는 철쭉꽃처럼 철이 덜 들거나 웃자리기도 하여
채워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은데,  하산할 수 밖에 없는 심정...
 
그래, 진작 盡人事를 했어야 했건만...
 뒤늦게 후회해봐야 '때는 늦으리'...
부족하고 미진한 입장으로 '待天命'할 수도 없으리...
 
에궁, 어러다가 강의 시간 늦겠네...
5교시 양신부님은 기도시간에 들어올 때는
""동작 그만!" 하며 부동자세를 취해야 하고,
지청구 한마디를 듣게 되니까요...ㅎ
 
사진 찍은 이튿날부터 기온이 급강하하고 세찬 바람이 불어
'마지막 잎새'를 찍게 되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보세요...며칠 차인데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댓글 8

  • 2008년 12월 14일 오전 5:07

    막상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이 사진들이 왜이렇게 아름답고 마음이 아린지... 지내면서 신학원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살짝 마음으로 열어 보겠습니다. 지나칠 수 있는 구석구석을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8년 12월 14일 오후 2:11

    신학교의 아름다움 땜시 가지마라...가지마라 하는 말을 흘러가는 바람소리로만 생각하고 몰래 도둑 발걸음을 하던 생각이 문득 나네요..ㅋ 갱년기가 들어오는 통에 소파를 내 몸 삼아 있는 사느라고 올 가을에는 신학교 언저리만 보았는데... 형제님 감사해요.(*__)~~♡.

  • 2008년 12월 14일 오후 5:18

    사진 솜씨가 작가 수준인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그 어느 때 사진보다 멋진 작품사진들이 많이 있네요. 이제 정말 원치 않아도 하산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시간이 다 되었네요. 과제물에 시험 치루느라 졸업이 목전에 있고 학우들과 함께 할 시간이 길지 않음을 전혀 실감치 못했는데... 못내 헤어지게 됨이 너무 아쉽네요. 이제부터 더 열심히 지나간 시간들을 그리며 이곳을 찾겠지요~^^*

  • 2008년 12월 14일 오후 6:18

    시몬형제님! 참 많은 달란트를 받으신 것 같아요. 작품사진들이 마음을 울립니다. 오늘따라....유난히.....^^

  • 2008년 12월 14일 오후 7:14

    '허허실법'이라드니 그 많은 달란트에서 '진리의 영'이 시몬형제에게 내리셨군요. 역시 영성시간에 졸지 않으셨나바!

  • 2008년 12월 17일 오후 3:58

    시몬형제님. 정말 프로급의 사진실력이네요

  • 2008년 12월 17일 오후 4:27

    정말, 유펠리치타스 수녀님의 검은 수녀복과 노란 은행잎 카페트와의 조화가 절묘하군요. 또한 수녀님의 갸름한 얼굴이 더욱더 빛나고 있어요. 2년동안 전례부를 위해 애쓰심에 감솨!!!!!!!!!!!

  • 2008년 12월 29일 오후 8:34

    멋진 사진과 좋은 글들... 아, 우리는 끝날때 쯤에 진가를 발휘하시네요. 덕분에 주교관 강아지 사진도 갖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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