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5.6)

2009. 5. 8. 오전 10:18:34

글자
 

수요 관상기도 시간에 수사님께서 강의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축구할 때 공을 넣거나, 양궁에서 과녁을 맞혔을 때 통쾌한 것은 적중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중이 중요하다. 종교생활도 종교의 본질에 적중해야 한다.

하느님이 종교에서 인간에게 줄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적중해서 받는다.

종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려는 것은 하느님 자신인데 우리는 지상의 것만 구한다.

하느님이 줄려고 하지 않는 것을 달라고 하면 하느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예수님은 부활하였을 때 문이 닫혀있어도 들어온다. 우리도 나중에 부활하면 그렇게 된다.

내가 뉴욕을 가고 싶으면 머리로는 즉시 뉴욕에 가서 있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몸처럼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최후에 심판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종말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매여서 아옹다옹하지 않는다.

그 사람 생활은 늘 초연하여 참 고요가 온다.

조용한 고요는 생명력이 없고 이 고요는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고요이다.

고요는 어디에서 오는가. 종말 신앙에서 오며 시작이자 거의 마지막이다.

“아! 이제 알았다. 이것인 줄 몰랐네, 이제 참다운 의미의 시작이로구나! “한다.

이제 정곡(正鵠)을 찌르게 되어 이 세상을 초연하게 살 수 있으므로 지상이 낙원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나그네 영성은 나그네 되어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지상에서 떠나서 지상사(地上事)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나그네 영성이라고 한다.

이 세상이 좋고 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이는 부활신앙, 종말신앙에서 오며

거기에서 고요해진다. 이 때 세상을 떠난 사람은 죽을 때 무섭고 힘들까?

이미 떠난 지 오래다. 다만 내가 죽을 때 어떻게 죽을지 그 장면은 궁금하다.


종말신앙을 가지고 이 지상에서 살면 초월(超越)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초월은 지상에서 0.1미리 떠서 사는 것이므로 늘 편안하다.

여기에서는 그 사람 생활자체가 관상기도가 된다. 버스를 타거나, 집에 있거나 늘 좋다.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 자체였다.

기도를 따로 할 필요가 없고 늘 좋으며 관상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무일도 기도를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무일도 기도를 하면 오히려 초월의 삶에 활력을 준다. 부득이 한 경우 기도하지 못하였을 때도 불안해하거나 양심에 걸린다는 것은 적중하지 못하였으며, 잘못된 것은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초월했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충실하며 다만 현실에 매이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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