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노동과 인간
창세기에 나타난 노동
4. 노동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영역이라고 교회는 확신한다. 인간에게 공헌해 온 많은 학문의 온갖 유산들을 보아서도 교회는 이러한 확신을 더욱 굳힌다. 인간학, 고생물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 많은 학문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교회의 이러한 확신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성의 확신인 동시에 신앙의 확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여기서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교회가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에게 자신을 표현하는데, 단지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서만도 아니고, 다양한 학문적 인식 방법의 도움을 받아서만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창조주요 구세주인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과 탁월한 섭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노동이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차원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를 창세기의 맨 첫 장에서 발견한다. 때로는 그 표현 방법이 진부하기는 해도 이 대목을 분석해 보면 바로 창조의 신비를 서술하는 맥락 속에 인간에 대한 근본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진리들은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결정적인 것이며, 동시에 원초적인 정의로운 상태에서나 인간과 맺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창조 계약이 범죄로 인해 파기된 후에나 이러한 진리들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중요한 선을 긋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남자와 여자로9) 창조된 인간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10)는 말을 듣는데, 이 말들은 노동에 관해 직접적으로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세상에서 인간이 수행할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참으로 이 말들은 극히 심오한 깊은 노동의 본질을 드러낸다. 적어도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은, 모든 인간 존재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의 행위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타동 활동, 즉 주체인 인간에 의해 시작되어 외적인 객체를 지향하는 행위로 파악되는 노동은 땅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지배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이 지배를 확인하고 발전시킨다. 성서에 나오는 땅이란 단어는 우선 인간이 거주하는 볼 수 있는 우주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된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볼 때 이 단어는 인간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상 전체를 내포할 수도 있다. 땅을 다스리라는 표현은 무한한 영역을 가리킨다. 그 표현은 땅(간접적으로는 볼 수 있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들, 즉 일시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이 찾아내 그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들은 변함없이 적절한 것이다. 이 말들은 과거의 문명과 경제뿐 아니라 현대의 현실 전체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발전의 양상까지를 다 포용한다. 이 미래에 펼쳐질 발전의 양상이란 어느 정도는 이미 암시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에게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인류 또는 각 국가들의 경제 생활과 문명화에 관하여 가속화의 시기라고 말하는데, 과학과 기술의 발전, 특히 사회 경제 생활을 위한 결정적인 발명들과 연결시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가속화 현상들은 아주 오래된 성서 텍스트가 말하는 본질적인 내용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점점 더 땅의 주인이 되며 또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굳혀가지만, 인간은 이러한 과정이 어떠한 경우에나 어떠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든 창조주의 원초적인 명령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필수 불가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이러한 과정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포용하고, 모든 세대, 모든 양상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을 포용한다. 동시에 그것은 개개의 인간 존재 안에, 개개의 의식적인 인간 주체 안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동시에 모든 개인은 거기에 포용된다. 개개인 각자는 모두 합당한 영역에서, 또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땅을 다스리는 인간으로서 그 거대한 과정에 참여한다.
객관적 의미의 노동: 기술
5. '땅을 다스리는과정에 대한 이러한 보편성과 동시에 다양성은 인간의 노동을 조명한다.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노동으로, 노동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 의미로서의 노동이 부각되는데 그 표현은 여러 세기의 문화와 문명에서 발견된다. 동물들을 순화시키고 사육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을 얻으며, 땅과 바다에서 여러 가지 천연 자원을 얻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인간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경작하기 시작하여 거기서 얻은 것을 자신의 용도에 맞게 변형시킬 때 비로소 본래 의미의 땅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농업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경제 활동의 첫번째 장이 되며, 생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한편 공업은 천연 자원이든 농산물이든 또는 광산품이든 화학 원료이든 간에 지상의 부를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인간의 노동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항상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서비스 산업 분야나 순수 이론적이거나 응용적인 연구 분야에 있어서도 옳은 이야기다.
공업과 농업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대부분이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인간의 손과 근육의 노고를 덜기 위해 점점 더 완벽하게 기계화되기 때문이다. 공업뿐 아니라 농업에서도 점차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이 이루어놓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산업 시대의 시초부터 최근의 전자 기술이나 정밀 공업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을 통해 계속 이루어진 발전 양상까지를 통틀어 볼 때 이러한 사실은 문명화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산업 과정에서 마치 기계가 일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인간은 단지 기계를 관리하고 작동시키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산업적인 발전이 새로운 양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터전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노동자 문제를 야기한 최초의 산업화나 그 뒤를 이은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의 변혁은 노동이 더욱더 기계화된 시대에도 노동의 합당한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란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업 및 그와 관련된 분야인 현대의 전자 기술, 특히 소형화 작업과 관련하여 통신 및 원거리 통신 기술 등의 발전은 인간의 지성에서 나오는 노동의 협조자로서의 기술이 노동의 주체와 (넓은 의미의) 객체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기술을 노동의 가능성이나 유용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노동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의 총체로 본다면, 기술은 의심없이 인간의 협조자이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수월케 하고 완전케 하며 신속하게 하고 증대시킨다. 기술은 과학 발달을 촉진시켜서 노동 생산의 양을 증가시키고 그 질도 향상시킨다. 그러나 예컨대, 노동의 기계화가 인간을 밀어내고 개인의 모든 만족감이나 창의력이나 책임감을 빼앗아버리거나, 많은 노동자들의 직업을 빼앗아버린다면, 또는 기계에 대한 과신으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면, 기술은 인간의 협조자가 아니라 그의 적이나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을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를 포함한 현대 전반에 걸친 맥락에서 알아듣는다면, 그 말씀은 또한 의심없이 기술과 관련을 맺으며, 인간의 재능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산물이요 인간의 자연 정복에 대한 역사적 확신이기도 한 기계화된 세상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현대는, 특히 하나의 사회라는 의미의 현대는 기술을 경제 발전에 작용하는 주요인으로 당연히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는 바로 인간이 그 주체라는 점에서, 인간의 노동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들이 따라다녔고 지금도 항상 따라다닌다. 이 문제들은 특히 윤리적이고 윤리 사회적인 특성의 내용과 긴장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은 수많은 종류의 기구들, 국가들과 정부들, 그리고 체제들과 국제 기구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며, 또한 교회에까지 도전한다.
주관적 의미의 노동: 노동의 주체인 인간
6. 땅을 다스리는 일이 인간의 의무라는 성서의 말씀과 관련 있는 노동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기 위해 우리는 객관적 의미에 기울였던 것보다도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다방면에서 자신의 전공에 따라 학문을 하는 학자들과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에게 밀접하고 상세하게 알려진 광범위한 문제들만을 겨우 다루어왔을 뿐이다. 이 분석에서 우리가 언급하는 창세기의 구절이 객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또한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또한 중대한 의미를 가득 지니고 있다.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천부적인 이성적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고 또 자신에 대해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므로, 인간은 노동의 주체가 된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일을 하고 노동 과정에 속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수행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 객관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인간의 인간성을 구현시키고, 바로 그 인간성 때문에 인간에게만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진리들은 최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특히 인간의 소명을 다루는 제1장─에서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는 성서 문맥의 이 다스림이란 말은 노동의 객관적인 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노동의 주관적인 면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인간과 인류가 땅을 다스리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노동은,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다스리는 유일한 자로 확신할 때라야 비로소 성서의 이 근본 개념과 부합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다스림은 객관적인 차원보다는 주관적인 차원에 더 관계되며, 이 차원은 노동의 윤리적 본질 자체를 결정한다. 인간의 노동이 고유한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윤리적 가치를 성취하는 것이 인격체이며, 의식적이며 자유로운 주체, 즉 자신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라는 사실과 명백하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근본적이고 영원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진리는 모든 시대를 특징짓는 중대한 사회 문제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 일차적인 의미를 지녀왔으며 지금도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인간이 하는 일의 유형에 따라 인간을 여러 계급으로 구별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노동자의 육체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육체 노동은 자유인에게는 무가치하다고 여겨 노예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전반적인 복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 이미 구약에 속해 있는 몇 가지 양상을 확장시킴으로써 이 면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11)분이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작업대에서 육체 노동을 하면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그 자체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노동의 복음으로, 인간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근본이 우선적으로 노동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에 있지 않고 노동을 하는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의 존엄성은 그 근거를 객관적인 차원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주관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인간을 그 하는 일에 따라 여러 계급으로 구분했던 예전의 방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것은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의 노동을 평가할 수 없다거나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여기에는 윤리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론이 즉시 따라온다. 즉,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해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누구나 당연히 노동의 객관적 의미보다 주관적 의미가 더 현저하게 부각됨을 깨닫게 된다. 상황을 이렇게 파악해 볼 때 인간이 하는 여러 가지 일들에 크든 작든 객관적인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주체, 즉 일을 성취하는 개인인 그 인격체의 존엄성을 척도로 삼아 각각의 노동은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노동이 그 활동에 대한 목적─때로는 대단히 요청되는 것이지만─을 지닌다 해도 모든 인간이 하는 노동과는 별도로 이 목적만으로는 아무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사실 결론적으로 분석해 볼 때, 어떤 노동이든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사회 통념상으로 단지 서비스로서의 가치밖에 없거나 대단히 단조로워서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다 하더라도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인 것이다.
가치 전도의 위협
7. 노동에 대한 바로 이러한 중요한 명제들이 풍요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로부터, 특히 노동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 자체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와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산업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노동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유물론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사상을 지닌 여러 가지 동향들에 반대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들은 노동을 일종의 상품으로 이해하고 취급했다. 노동자, 특히 산업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팔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고용주란 동시에 자본주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생산을 가능케 하는 모든 노동 도구와 수단을 소유한 자를 뜻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특히 19세기 초반에 널리 퍼졌다. 그 뒤에 이런 종류의 노골적인 표현들은 거의 사라지고 노동에 대해 더욱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생산 도구 및 수단 사이의 상호 작용은 여러 가지 형태의 집산주의와 병행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본주의에는 새로 구체화된 상황들과, 노동자의 조합들과 공공 기관의 활동들, 그리고 대규모의 다국적 기업들의 출현 등으로 인해 생긴 또 다른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이 개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재화 생산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상품이나 또는 어떤 비인격적인 힘(흔히들 노동력이라 표현한다)으로 취급할 위험이 항상 따른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유물론적 경제주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질 때 위험이 항상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기 위한 체계적인 기회(어떤 의미로는 자극)가 일방적으로 물질 문명으로만 치닫는 급격한 발전 과정에 의해 마련된다. 그래서 노동의 객관적인 영역에 일차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한다. 반면에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노동의 주체와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주체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모든 사회 상황 속에서는 맨 처음부터 창세기의 말씀으로 규정된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심지어는 전도되기조차 한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노동과 독립하여 홀로 노동의 실제적인 주체요, 만든 자, 창조한 자로 대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화 생산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취급된다.12) 그 계획이나 이름이 어떻든 거기서 발생하는 바로 이러한 질서의 전도는 정당하게도 자본주의라 일컬어지는데 아래에서 더 충분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반대되는 하나의 체제, 즉 경제 사회적인 체제로서 명백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제 과정`─`생산 구조에서 우선적인 것은 노동이다`─`에 대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분석해 볼 때 초기 자본주의의 오류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 오류란 인간이 물질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말하는데, 즉 물질적인 생산 수단의 총체로서, 하나의 도구로서 취급되며 자신이 하는 노동의 참된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주체요 만드는 자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산 과정 전체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취급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관련된 말씀에 비추어본 인간의 노동에 관한 분석이 어찌하여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의 참된 핵심에 이르는가를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개별 국가들이나 더 크게는 국제 관계나 대륙간의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경제적인 정책의 양상 전반에 걸쳐 중심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 특히 세계 속에서 느끼는 동서 진영의 긴장뿐 아니라 남북간의 긴장을 생각할 때에 더욱 그렇다. 이와 같은 현대의 윤리, 사회적인 문제의 영역에 관하여 요한 23세는 회칙 좥어머니요 스승」에서 그리고 바오로 6세는 회칙 좥민족들의 발전」에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노동자들의 결속
8. 인간의 노동을 그 주체라는 차원, 다시 말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인격체인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루려한다면 [새로운 사태] 반포 이후 90년 동안 노동의 주관적인 영역과 관련하여 발전되어 온 것들을 적어도 개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비록 노동의 주체는 항상 동일하게 인간이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폭넓은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의 주체라는 이유로 볼 때 노동은 하나의 단일한 것(하나이며 매번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객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면 많은 노동이 있다. 즉, 노동의 종류는 다양하다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문명의 발달은 끊임없이 이 분야를 넓혀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노동 형태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은 사라졌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원리로 보아 이러한 것은 으레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혹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어떤 불규칙적인 요소들이 끼어들지 않았는지, 끼어들었다면 얼마나 끼어들었는지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이 같은 광범위한 변칙 사태가 때로는 프롤레타리아 문제라고 기술되기도 하는 이른바 노동자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제들이 정당한 사회적 반발을 야기시켰으며, 노동자들 특히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 대단히 돌발적인 결속을 이루게 하여 격렬한 위험 사태로 몰고 갔다. 노동자들 특히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려는 산업 현장에서 더욱더 전문화되고 단조로우며 비인격화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결속할 것을 요청하고 단체 행동을 할 것을 요청한 것은 사회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고 설득력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지위 하락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노동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임금의 착취와 전대 미문의 노동 조건, 노동자에 대한 사회 보장 문제 등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반발은 노동 세계를 커다란 결속력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로 결합시켰다.
[새로운 사태」나 그 후에 반포된 교회 교도권의 수많은 문헌들이 주장하는 노선을 따른다면,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던 당대의 노동자들이 하늘을 향해 복수를 요청하며13) 자기네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당하고 악랄한 체제에 대해 반발한 것은 사회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당한 처사였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는 경제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적인 사회 정치적 체제에 유리하였다. 이 체제는 단지 자본가들에 의해서만 경제의 주도권이 강화되고 보호되는 체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단지 생산의 도구이며, 자본이 생산의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요인이요 목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내세워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체제였다.
그때부터 노동자의 결속은 더욱더 명백해지고 더욱더 분명해진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각성과 더불어 많은 상황에서 대단히 큰 변화를 초래했다. 신자본주의 또는 집산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여러 가지 새로운 체제들이 안출되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고 생산 관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 사실상 그렇게 한다. 노동자들은 적절한 조직을 통해 노동의 조건과 보수, 또한 사회법 제정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사상 체계나 권력 체제 그리고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들이 극도의 부조리를 그대로 용인하거나 새로운 부조리를 만들어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문명과 통신의 발전은 전세계적으로 인간의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에 대한 더욱더 완전한 진단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노동 세계에서 특별한 결속을 위해 노동자들 사이에 일치를 자극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다른 형태의 불의도 드러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의 과정을 치른 나라들에서 있었던 사실이다. 또한 농업이나 그와 유사한 일을 주요한 노동 영역으로 삼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있었던 사실이다.
노동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결속(이 결속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협력을 배제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운동은 상황이 다른 집단들과 관련을 맺을 필요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집단들은 전에는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체제와 생활 조건이 바뀜에 따라 사실상 무산 계급화(Proletarianization)라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거나, 비록 명칭이야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그런 명칭을 붙일 만한 무산 계급 상태에 이미 현실적으로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하는 지식 계급(Intelligentsia)으로 이루어진 어떤 부류나 집단에게도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교육받을 기회가 늘어나고 해당 분야에서 학위나 자격증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될 때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인들의 실직이 생기거나 늘어나는 것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가 참으로 필요로 해서 요청하는 고용이나 봉사 형태에 맞지 않거나, 또는 교육 내지는 전문 교육을 요구하는 노동의 수요가 육체 노동의 수요보다 적을 때, 또는 보수가 적을 때이다. 물론 교육은 그 자체로 항상 가치 있는 것이고, 인간의 인격을 풍요롭게 하는 중대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산 계급화의 과정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의 주체와 그 주체의 생활 조건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 도처에서, 여러 나라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항상 새로운 결속 운동이 필요하다. 노동의 주체에 대한 사회적 지위 격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빈곤과 기아 지역의 증가는 이러한 결속이 현실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교회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한다. 교회는 이를 자신의 사명이며 봉사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에 나타난다. 많은 경우에 가난한 이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이 침해된 결과로 나타난다. 인간의 노동을 위한 기회가 실직의 결과로 제한되거나 또는 노동과 그에 따른 권리,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의 부양을 보장하는 권리가 평가 절하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생긴다.
노동과 인간의 존엄성
9.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을 더욱 밀접하게 규정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적어도 대략적으로라도 다룰 때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노동의 특수한 도덕적 가치를 더욱 충분히 특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땅을 정복하여라14)라는 성서의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주권을 노동을 통해서 행사해야 한다는 창조주의 뜻이 이 말씀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과의 원초적인 계약을 깨뜨리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15)는 말씀을 듣게 되었어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분과 비슷하게 창조된16)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의도는 철회되거나 취소되지 않았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그때부터 인간의 노동에 따르는 때때로 힘든 노고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노동이 땅을 주도하는 자로서의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세상에 대한 지배를 성취시키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고는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라서 누구나 다 안다. 노고는 때때로 예외적인 노동 조건에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노고는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헤치며17) 땅을 가꾸는 일로 긴 나날을 보내는 농부들뿐 아니라, 광부들, 석공들,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제련공들, 주택 및 기타 건설 현장에서 자주 상해 내지 죽음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익숙해 있다. 또 비슷하게는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들, 과학자들,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릴 책임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노고는 밤낮으로 환자들의 병상을 지키는 의사와 간호원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노고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자신들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가정과 자녀 양육의 책임과 매일매일의 무거운 짐을 지는 여성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노고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며, 노동이 보편적인 사명이기 때문에 노고는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노고 때문에 노동은 인간에게 좋은 것이다. 성 토마스의 결론대로 노동은 비록 힘든 선18)이란 특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노동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노동은 그것이 유용하거나 즐길 만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 달리 말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부합하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높여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좋은 것이다. 노동의 윤리적 의미를 더 명백히 정의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이 진리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노동이 인간에게, 인간의 인간성에 좋다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면서 자연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 완성을 이루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인간답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이 없이는 근면이 덕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고, 더군다나 왜 근면이 덕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덕이란 하나의 도덕적 관습으로서 인간을 인간으로서 선하게 만드는 것19)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노동으로 물질은 가치를 얻게 되나 인간 자신은 존엄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20) 하는 정당한 걱정을 떨쳐주지 못한다. 또 잘 알려진 바로는, 인간을 거슬러 여러 가지 형태로 노동을 이용할 수 있고, 고립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이란 체제로 인간을 처벌할 수 있으며, 노동이 인간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노고, 달리 말해서 노동자를 착취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노동의 사회적 질서와 함께 덕으로서의 근면과 관련된 도덕적 의무를 긍정적으로 요청한다. 이 도덕적 의무는 노동으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기력이 쇠진될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특히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이나 주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에라도, 노동으로 인간성이 격하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과 사회: 가정과 국가
10. 인간의 노동에 관한 개인적 차원에 대해 이렇게 확인했으니, 우리는 노동에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제2의 가치 영역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소명이기도 한 가정 생활을 이루는 기본이다. 이 두 가지 가치 영역─하나는 노동에 연결되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활에서 가정이라는 성격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은 올바르게 일치되어야 하고 올바르게 서로 스며들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노동은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되는데, 그것은 가정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얻는 생활 유지 수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근면은 또한 가정에서의 교육 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이가 다른 일들 가운데 노동을 통해서 인간답게 되고, 인간답게 되는 일이 엄밀히 말해서 교육 과정 전체의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노동의 두 가지 국면이 여기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하나는 가정 생활과 그 유지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의 목적들, 특히 교육의 성취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두 가지 국면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많은 점에서 상호 보완한다.
가정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윤리적 질서를 형성하는 데 막중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점을 상기하고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이 회칙에서 우리는 이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가정은 노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인 동시에 누구에게든 집안에 있는 노동을 배우는 최초의 학교가 된다.
노동의 주체라는 이러한 관점에서 파생하는 제3의 가치 영역은 특별한 문화적 역사적 연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이 속해 있는 대사회(大社會)와 관계가 있다. 국가라는 성숙한 형태를 아직 갖추지 않았을 때라도 이러한 사회는 각 개인이 가정 안에서 어떤 특정 국가의 문화를 결정하는 내용과 가치를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도 각자에게 위대한 교육자일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세대에 걸쳐 노동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인간성과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자신의 노동으로 동료들과 함께 공동선의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이 전인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유산 증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 가지 영역은 그 주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노동에 항상 중요하다. 그리고 이 차원은, 달리 말해서, 노동자의 구체적 현실은 객관적인 차원보다 우위에 놓인다. 주관적인 차원에서 창세기의 말씀대로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계에 대한 지배가 우선적으로 실현된다. 땅을 다스리는 바로 그 과정, 즉 노동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특히 금세기에 거대한 발전을 이룩한 기술적인 수단으로 표시된다. 이 발전은 노동의 객관적 차원이 인간의 품위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박탈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주관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 한 유익하고 긍정적인 현상이다.
9. 창세 1,27.
10. 창세 1,28.
11. 히브 2,17; 필립 2,5-8 참조.
12. [사십주년], 55항: AAS 23(1931), 221면 참조.
13. 신명 24,15; 야고 5,4; 창세 4,10 참조.
14. 창세 1,28 참조.
15. 창세 1,26-27 참조.
16. 창세 3,19.
17. 히브 6,8; 창세 3,18 참조.
1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 q.40, a.1,c.; I-II, q.34, a.2, ad 1 참조.
19. [신학대전], I-II, q.40, a.1,c.; I-II, q.34, a.2, ad 1 참조.
20. [사십주년], 55항: AAS 23(1931), 221-222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