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 생명의 복음

2005. 4. 18. 오후 1:50:09

글자


생명의 복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서론

    1.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날마다 이 생명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불굴의 신념으로 모든 시대와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 이를 "기쁜 소식"으로 전파해야 합니다.
    인간 구원의 빛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한 아기의 탄생"이 기쁜 소식으로 선포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루가 2,10-11). 이 "큰 기쁨"의 원천은 구세주의 탄생입니다. 그러나 성탄은 또한 모든 사람의 출생의 완전한 의미도 밝혀주는 것이며, 따라서 메시아 탄생에 따르는 기쁨은 모든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토대이며 그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요한 16,21 참조).
    예수께서는 당신 구속사명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참으로, 그분께서는 성부와의 일치에서 오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성자 안에서, 자유롭게 그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생명" 안에서 인간 생명의 모든 양상과 국면들이 그 충만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

    2.
인간은 현세적인 존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충만한 생명이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소명이 지닌 숭고함은, 인간 생명이 현세적 측면 안에서까지도 위대함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실제로, 시간 안의 생명이란 인간 실존의 통합된 과정 전체를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며, 출발점이고, 핵심입니다. 그 과정은 뜻밖에, 그리고 분에 넘치게도, 하느님의 약속으로 밝혀지고, 하느님 생명의 선물로 새롭게 된 과정이며, 영원성 안에서 그 완전한 실현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1요한 3,1-2 참조). 그와 동시에 각 개인의 현세적 생명이 지니고 있는 상대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초자연적인 부르심입니다. 결국, 지상에서의 생명은 "궁극적(ultimate)"인 실재가 아니고 "준궁극적(penultimate)" 실재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생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맡겨진 신성한 실재(sacred reality)입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이 생명을 보존해야 하며, 사랑으로, 그리고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에게 우리 자신을 선물로 내어 줌으로써 완성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에게서 받은 이 생명의 복음1)이 모든 이들-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에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생명의 복음은 모든 사람의 기대들을 놀랍게 충족시켜 주며, 한편으로 그것들을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역경과 불안 한가운데에서도 진리와 선을 향해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성의 빛과 드러나지 않은 은총의 작용에 의해서, 인간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신성한 가치를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 안에서(로마 2,14-15 참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이러한 원초적인 선물의 가장 높은 단계까지 향유할 수 있는 모든 인간 존재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권리 인정의 토대 위에 모든 인간 공동체와 정치 공동체들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다음과 같이 환기시킨 놀라운 진리를 알고 있는 만큼, 이 권리를 옹호하고 촉진시켜야 합니다. "성자께서는 사실 당신의 강생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것입니다."2) 이러한 구원 사건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신"(요한 3,16)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아울러 계시해 줍니다. 신앙 안에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고 있는 교회는 늘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이러한 인간의 가치를 깨닫고 있습니다.3) 교회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은 역사상 모든 시대의 무너뜨릴 수 없는 희망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복음, 인간 존엄성의 복음, 생명의 복음, 이 셋은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살아있는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을 대표합니다.4)

    인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들

    3. 모든 인간은, 사람이 되신(요한 1,14 참조) "하느님 말씀"의 바로 그 신비에 의해서 교회의 모성적 보호에 맡겨졌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모든 위협을 그 가슴 깊이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위협은 구원을 위한 하느님 아들의 강생에 대한 교회 신앙의 핵심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교회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에 힘쓰도록 합니다(마르 16,15 참조). 오늘날 이러한 선포는 특히 절박합니다. 개인과 민족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들이, 특히 생명이 약하고 자기 방어능력이 없는 곳에서, 유례 없이 증가하고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 기아, 풍토병, 폭력과 전쟁 같은 종래의 재앙에 덧붙여 새로운 위협들이 위험스러울 만큼 방대한 규모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늘날의 모든 중대한 문제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인간 생명에 대한 많은 범죄와 공격들을 강력하게 단죄하고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본인은 공의회의 말을 다시 인용하여,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그 단죄를 되풀이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이것이 모든 올바른 양심의 진솔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감금, 추방,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등,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실로 파렴치한 노릇이다. 그것은 인간 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5)

    4.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상황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즉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새로운 전망과 더불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위협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문화 사조가 생겨나 자리를 굳히고 있습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들에 새롭고-가능하다면-더욱 사악한 성격까지도 부여하는 이러한 문화 사조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즉 광범위한 여론의 분야들이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생명을 거스르는 일련의 범죄들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처벌의 면제뿐 아니라 심지어 국가의 공인까지도 요구합니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행위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그리고 보건 제도의 무료 봉사까지 받아가면서 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생명과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아마도 자국 헌법의 기본 원칙을 벗어나면서까지, 생명을 거스르는 이러한 행위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입법화하고 심지어 그 행위들을 모두 합법화합니다. 이것은 불안한 병증이면서 동시에 중대한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일단 범죄라고 만장일치로 내려진 결정과 상식적인 도덕 판단에 의해 거부된 것들이 사회적으로 점차 용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 생명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사명을 가진 의료업의 일부 분야들조차 점차적으로 인격을 훼손하는 이러한 행위들을 수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료업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은 왜곡되고 모순에 부딪히며,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품위는 떨어집니다. 이러한 문화적, 법적 상황 속에서 세계의 많은 민족들을 억누르고 있고 국가와 세계의 실제적인 책임과 관심을 요구하는 심각한 인구통계학적, 사회적, 가정적 문제들은, 진리에 역행하고 개인과 국가의 선익에 역행하는 그릇되고 기만적인 해결책들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만들어낼 최종적인 결과는 비극적인 것입니다. 장차 태어날 단계에서든 아니면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든 수많은 인간 생명이 파괴되는 현실은 극도로 심각하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심각하고 불안한 것은, 그러한 상황이 만연되면 그 결과로 양심 자체가 어두워져서 인간 생명의 기본적인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모든 주교들과의 일치 안에서

    5. 1991년 4월 4일부터 7일까지 로마에서 열린 특별 추기경회의는 우리 시대의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추기경들은 이 문제와, 이 문제가 전체 인류 가족과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제기하는 도전을 철저하게, 자세히 토론했습니다. 그런 후에 추기경들은, 현재의 상황과 오늘날 인간 생명의 가치를 위협하는 공격들을 고려하여,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지닌 권위를 가지고 인간 생명의 가치와 그 불가침성을 재천명해 줄 것을 한마음으로 본인에게 청원하였습니다.
    이러한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 본인은 1991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형제 주교들 개개인에게 개별적인 서한을 보내어, 주교단의 단체성 정신에 따라서 구체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6) 이 서한에 답장을 보내주고, 귀중한 내용과 제안과 제의를 보내준 모든 주교들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주교들은 생명의 복음에 대한 교회의 교의적이고 사목적인 사명을 공유하려는 일치된 지향을 입증해 보여주었습니다.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반포 100주년 기념 직후에 쓴 앞의 서한에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비유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켰습니다. "1세기 전에 노동자 계층이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있을 때, 교회가 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신성한 권리를 선포함으로써 용기 있게 그들을 옹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또 다른 범주의 사람들이 생명의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있는 때에 교회는 그와 똑같은 용기로써 소리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의무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위협당하고 멸시받으며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사람들 편에서 복음을 외칩니다."7) 오늘날 연약하고 방어 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의 생명에 관한 기본권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말, 교회가 당시의 불의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교회는 여전히 침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까지 과거의 사회적 불의들은 극복되지 않고 있으며, 그것들이 비록 새로운 세계 질서의 관점에서 진보를 위한 요소들이라고 제시되고 있다고 해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더욱더 통탄할 형태의 불의와 억압으로 한층 심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모든 나라 주교단의 협력 결과인 이 회칙은 인간 생명과 그 불가침성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재천명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개개인과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모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오직 이 방향에서만 당신은 정의, 개발, 참된 자유,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호소가 교회의 모든 아들딸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이 호소가 모든 남녀의 선익과 사회 전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6. 믿음 안에 본인의 모든 형제자매와의 깊은 일치 안에서, 그리고 모든 이들을 향한 참된 우정으로 고취되어, 본인은 생명의 복음을 다시 한번 숙고하고 선언하고자 합니다. 이 생명의 복음은 양심을 비추는 진리의 광채이며, 어두워진 시각을 바로잡는 밝은 빛이고, 우리가 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늘 새로운 도전들에 충실하고 확고부동하게 맞서 나가기 위한 확실한 원천입니다. 본인은 가정의 해의 강렬한 체험을 회상할 때면, 마치 "세계의 모든 가정에게" 보낸 교서8)를 완결짓기라도 하듯이, 새로운 확신으로 모든 가정에 기대를 걸게 됩니다. 그리고 가정을 돕기 위한 총체적 참여가 모든 차원에서 다시 일어나고 강화되어, 오늘날-수많은 어려움과 중대한 위협들 가운데에서도-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언제나 "생명의 성역"9)으로 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 즉 생명의 백성, 생명을 위한 백성에게, 본인은 가장 긴급히 호소하고자 합니다. 이 호소는 우리 함께 이 세상에 우리의 새로운 희망의 징표들을 제공하고, 진리와 사랑의 참된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정의와 연대성이 증대하고 인간 생명의 새로운 문화가 확정되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제 1 장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인간 생명에 대한 현대의 위협

    "카인은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창세4,8): 생명에 대한 폭력의 기원

    7.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셨다.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지혜 1,13-14; 2,23-24). 충만하고 완전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느님의 모상대로 인간이 창조되던 태초에 선포된 생명의 복음은(창세 2,7; 지혜 9,2-3 참조) 세상에 들어와 인간의 전존재 위에 무의미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죽음의 고통스런 체험과 대조를 이룹니다. 죽음은 악마의 시기와(창세 3,1.4-5 참조) 첫 조상들이 지은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그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창세 4,8).
    이 첫 번째 살인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창세기의 한 지면 속에 독특한 어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인류 역사의 책 속에, 빈번하게, 변함 없이 더욱 악화되어 가면서, 날마다 되풀이하여 쓰여지고 있는 지면입니다.
    원시적인 구조와 극도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이 성서 이야기를 함께 다시 읽어봅시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있었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자 카인이 주님께 하소연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이렇게 말씀하시고 주님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창세 4,2-16).


   
8.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셨기" 때문에 카인은 "몹시 화가 나"있었으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창세 4,4-5).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봉헌보다 아벨의 봉헌을 반기셨는지 성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성서 본문은 하느님께서 아벨의 예물을 더 반기시기는 했지만 카인과의 대화를 단절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에 직면한 그 자신의 자유를 환기시키면서 카인을 훈계하십니다. 즉 인간은 결코 악을 저지르도록 운명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카인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들짐승처럼 마음의 문턱에서 먹이를 향해 덮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는 죄의 사악한 힘에 의해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죄와 직면하여 아직 자유롭습니다. 그는 죄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극복해야만 합니다. "죄가……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창세 4,7).
시기와 분노가 주님의 경고보다 우세하였고, 그래서 카인은 자기 형제를 덮쳐 그를 죽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보듯이 "성서는, 형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야기 안에서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 안에 분노와 시기가 존재하며, 원죄의 결과들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동료 인간의 적이 되었습니다."10)
형이 아우를 죽입니다. 첫 번째 형제 살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살인은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묶어주는 "영적" 친족관계에 대한 침해입니다.11) 이 영적 친족관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기본적 선, 즉 동등한 인격적 존엄성을 공유합니다. 또한 "혈육"의 친족관계 역시 흔히 침해됩니다. 예컨대, 낙태의 경우처럼 부모와 자녀의 유대관계 사이에 생명에 대한 위협이 발생할 때, 또는 광의의 가족 또는 친족 관계 안에서, 안락사를 장려하거나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웃에 대한 모든 폭력행위의 뿌리에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던"(요한 8,44) 그 악마의 "사고"에 대한 허용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계명의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악마의 자식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1요한 3,11-12). 그러므로 역사의 시초에 카인이 동생을 죽인 것은 악마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증거입니다. 지상 낙원에서 인간이 하느님께 거역한 이후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죽음을 부르는 싸움이 뒤따랐습니다.
    그 범죄가 있은 후, 하느님께서는 살해된 자의 앙갚음을 위해서 개입하십니다. 아벨의 죽음에 대해 물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카인은 후회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에, 그 질문을 거만스럽게 회피합니다. "저는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저는 모릅니다." 즉, 카인은 거짓말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이념들이 인간에 대한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들을 정당화하고 위장하려고 할 때 사용했고,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수법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은 아우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타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형제자매들을 위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있는 오늘의 경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지닌 증후 속에는 노인, 병약자, 이민자, 어린이 등 사회의 힘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연대 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존, 자유, 평화 같은 기본적인 가치들이 관련되어 있는 세계 민족들 간의 관계에서조차 무관심이 흔히 발견됩니다.

    9.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범죄를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두실 수 없는 분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의 피는, 그 피가 흘렀던 땅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정의를 펼치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창세 37,26; 이사 26,21; 에제 24,7-8 참조). 교회는 이 대목에서 "하느님께 정의를 탄원하는 죄악들"이라는 이름을 취했으며, 교회는 그 중에 첫 번째로 의도적인 살인죄를 포함시켰습니다.12) 고대의 많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에게도 피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과연 "피는 곧 생명"(신명 12,23)이며, 생명, 특히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 생명을 공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의미로 하느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과 땅으로부터도 저주를 받았으며, 땅은 그에게 그 소출을 내주기를 거부할 것입니다(창세 4,11-12 참조). 그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광야와 사막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살인을 부르는 폭력은 인간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습니다. 땅은 풍요로운 곳, 조화로운 인간 관계가 있고 하느님과의 우정이 있는 곳, 즉 "에덴 동산"(창세 2,15)이었지만, 결핍과 고독이 있는 곳, 하느님과의 단절이 있는 곳, 즉 "놋의 땅"(창세 4,16)으로 변했습니다. 카인은 쫓겨나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창세 4,14 참조). 불확실과 불안이 영원히 그를 따라다니게 될 것입니다.하지만 언제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벌을 내리시면서도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습니다"(창세 4,15). 이토록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특별한 표적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도록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벨의 죽음에 대해 앙갚음하겠다는 지향조차 벗어나서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보고하고 방어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살인자조차도 인격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몸소 그것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정의라는 역설적인 신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말했듯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던 악행의 시작인 근친 살해가 저질러지자마자, 즉시 하느님 자비의 신법이 베풀어져야 했습니다. 만일 처벌이 피고인에게 즉시 가해진다면, 정의를 집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참아주거나 완화시켜 주지 못하고, 즉시 피고인에게 벌을 내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당신이 계신 곳에서 물러나게 하여 그가 태어난 곳에서 멀리 유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다운 삶에서 들짐승의 거친 생존양식에 가까운 삶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죽이기보다는 바로잡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살인이 또 다른 살인행위를 통해서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13)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4,10) : 생명 가치의 상실

    10.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계속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 의해서 흘려진 피가 계속해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하신, 카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질문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계속 인간의 역사를 얼룩지게 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공격의 범위와 위험성을 깨닫게 하는 질문이며, 무엇이 이러한 공격을 일으키고 조장하는지를 발견하게 하는 질문이고, 이러한 공격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결과들이 개인과 민족들의 실존에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몇몇 공격들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을 바로잡을 수도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태만에 의해서 더 심하게 악화됩니다. 다른 공격들은 폭력, 증오, 이익 갈등이라는 상황들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사람들이 살인, 전쟁, 집단 학살, 민족 말살 등으로 타인을 공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생명에 대한 폭력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민족간의, 그리고 사회 계층 간의 불의한 자원 분배 때문에 가난, 영양실조, 기아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경우뿐만 아니라 추악한 무기 매매 속에도 내재하는 폭력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폭력은 우리 세계를 피로 얼룩지게 하는 수많은 무력 분쟁을 낳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생태계 균형 파괴에 의해서, 범죄적인 마약의 확산에 의해서, 또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에 대한 심각한 위험성까지 내포하고 있는 어떤 유형의 성행위에 대한 조장에 의해서 야기되는 죽음의 확산은 어떻습니까?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들의 방대한 목록을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명백하거나 은밀한 형태로 나타나는 이러한 위협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11.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와는 다른 범주의 공격들, 즉 생명의 초기 단계와 마지막 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범주의 위협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공격들은 과거에 비해서 새로운 성격들을 띠고 있으며, 심상치 않은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반화된 여론은 이러한 공격들을 더 이상 "범죄"로 간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리"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는 이러한 위협들을 법적으로 승인하고 보건원의 무료 봉사를 통해서 그런 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공격들은 인간의 생명이 가장 약한 시기에, 자신을 방어할 아무런 수단을 지니지 못하고 있을 때 가해집니다. 더 더욱 심각한 것은, 아주 흔히, 이러한 공격이 가정 한가운데에서, 가족들의 공모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본성상 "생명의 성역"이라고 불리는 그 가정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많은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근본적인 문화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의 위기는 지식과 윤리의 토대 자체에 관한 회의주의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회의주의는 인간됨의 의미와 인권과 의무의 의미 파악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실존적인 어려움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생겨나며, 이러한 어려움은 복잡한 사회에 의해서 더욱 악화됩니다. 그러한 사회 안에서 흔히 개인, 부부, 가족들은 각자 자신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극도로 빈곤하고, 불안하거나 또는 좌절스러운 상황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생계 유지를 위한 고투, 참을 수 없는 고통의 현존, 또는 폭력 사건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폭력 사건들은 생명 수호와 증진에 대한 선택이 때로는 영웅주의에 가까울 만큼의 희생을 요구하게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비록 양심은 끊임없이 생명의 가치를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가치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실존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권이라는 사실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만드는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의학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초기 또는 마지막 단계에서 생명을 거스르는 일련의 범죄들을 은폐하려는 경향 속에서 오늘날 생명의 가치가 어떻게 일종의 "상실"이나 "쇠퇴" 과정을 겪게 되는지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설명해 줍니다.

   
12. 실제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도덕적 불확실성이라는 풍조를, 어느 면에서는 오늘날 사회문제들의 다양성과 중대성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으며, 그 때문에 개인들의 상대적인 책임이 경감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보다 훨씬 큰 실재, 즉 진정한 죄의 구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실재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실재에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연대성을 거부하고, 많은 경우 진정한 "죽음의 문화"라는 형태를 취하는 그러한 문화의 출현입니다. 강력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향들이 이러한 죽음의 문화를 활발하게 조장합니다. 이 경향들은 지나치게 효율성에만 관심을 가진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부추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 상황을 바라본다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싸움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더 큰 수용과 사랑과 보살핌을 요구하는 생명은 쓸모 없는 생명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참을 수 없는 짐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런 생명을 거부합니다. 병이나 장애 때문에, 더 간단하게는 단지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들의 복지나 생활양식을 위협하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일종의 "생명에 대한 음모"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음모는 개인적 관계, 가족관계, 또는 집단관계 안의 개인들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국제적인 차원에서 민족과 국가들 간의 관계에 타격을 입히고 왜곡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13. 낙태의 확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의술의 도움 없이 모태 안에서 태아를 죽일 수 있는 약품을 생산하는 데 엄청난 액수의 자금이 투자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투자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로 과학 연구는 거의 독점적으로 더욱더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생명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낙태를 어떤 종류의 통제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생산품 개별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피임이 안전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낙태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흔히 제기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가, 피임이 도덕적으로 불법이라고 고지식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낙태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반론은 근거가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음에 찾아올 낙태의 유혹을 배제하겠다는 생각으로 피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임 사고방식"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가치들은, 원하지 않는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는 그 유혹을 강화시키는 것들입니다. 이 "피임 사고방식"은 부부행위의 충만한 진실을 중시하는 가운데 삶으로 실천하는 책임있는 부모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피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곳에서 낙태 조장 문화가 특별히 위세를 떨칩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피임과 낙태는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악입니다. 즉 전자가 부부애의 정당한 표현인 성행위의 충만한 진실을 훼손하는 반면에, 후자는 정의라는 덕목에 대립되며 "살인하지 말아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것입니다.
    피임과 낙태가 그 본질과 도덕적인 중요성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둘은 흔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나무의 열매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피임과 나아가서 낙태까지도 현실 생활의 어려움에서 오는 압박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압박이 하느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분투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결코 면제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많은 경우에 그러한 행위들은 성의 문제에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쾌락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들 속에는 출산을 자기 성취의 방해물로 여기는 자기 중심적인 자유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관계의 결과 생겨날 수 있는 생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하는 적이 되며, 낙태는 피임이 실패할 경우에 유일하게 남는 선택 가능한 결정적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피임을 행하는 마음과 낙태를 행하는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는 점점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화학 약품, 자궁내 피임 기구, 백신의 개발이라고 하는 위험하고 급박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피임약들과 마찬가지로 용이하게 보급되어, 실제로는 새로운 생명이 발달하는 아주 초기 단계에서 낙태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게 합니다.

   
14.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종종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다양한 인공 생식 기술들이 실제로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가는 문을 엽니다.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도, 이 기술들은 출산을 부부행위의 전적인 인간관계에서 분리시키기 때문에,14) 매우 높은 실패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실패율은 꼭 수정(受精)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 다음 과정에서 개발되는 수정란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수정란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죽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됩니다. 게다가 생산된 수정란의 수는 대개 여성의 자궁 속에 이식하기 위해 필요한 수보다 많으며, 이른바 "예비 수정란"이라고 부르는 이 수정란들은 폐기되거나 또는 실험에 사용됩니다. 이 실험이란 과학 또는 의학의 발전이라는 미명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해 버릴 수 있는 단순한 "생물학적 재료"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자궁 속의 아기에게 필요할 수도 있는 의학적인 처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된다면 아무런 도덕적 반대를 받지 않는 태아 진단은 흔히 낙태를 권고하고 시술해 주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론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는 우생학적 낙태입니다. 이 여론은 일정한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생명만을 받아들이고, 어떤 제한이나, 장애나 질병으로 손상을 입은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사고에 근거해서 우생학적 낙태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우생학적 낙태가 "치료적 개입"(therapeutic inter  ventions)의 필요성과 모순되지 않는 일관성을 가진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중대한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게 가장 기본적인 보살핌, 심지어 젖을 먹이는 것조차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훨씬 더 위험하고 급박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낙태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 동일한 논리에 따라서 영아 살해까지도 정당화하자는 주장들이 이곳저곳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영원히 과거에 남겨두고 왔다고 믿고 싶은 야만적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5. 불치병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에게 드리운 위협도 그에 못지 않게 심각합니다. 고통을 직면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고통의 뿌리를 없앰으로써, 적절한 어떤 순간에 죽음을 앞당김으로써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이 대단히 커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사정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하는 데 기여하며, 이 모든 사정들은 하나의 가공할 결과를 향하여 수렴됩니다. 환자에게는 고통이나 모진 고생, 그리고 나아가 극심하고도 지속적인 고통이 가져오는 절망감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한 개인의 본인 자신과 가정생활의 깨지기 쉬운 균형 상태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환자는 점차 증가하는 효과적인 의학적, 사회적 도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약함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는 한편, 환자와 가까운 사람들은 비록 잘못된 것이긴 하나 이해는 할 수 있는 그러한 동정심에 의해서 자극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고통 속에서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고통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제거해야 할 해악의 전형으로 여기는 문화적 풍조에 의해 더욱 악화됩니다. 특히 고통의 신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종교적인 시각이 결핍된 경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현대문화 안에는 일종의 프로메테우스적인 태도가 존재합니다. 이 태도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유도합니다. 이런 경우에 실제로는 모든 의미나 희망이 박탈된 죽음이 그 개인을 압도하고 좌절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장되고 비밀리에 행해지거나, 또는 공개적으로, 심지어 합법적로 행해지는 안락사의 확산 현상 속에서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비극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느끼는 그릇된 동정심과 아울러, 때로는 효과도 없고 사적으로도 큰 부담을 주는 비용을 피하자는 실용주의적인 동기에 의해 정당화됩니다. 따라서 기형아들이나, 중증 장애인들, 지체부자유자들, 노인들, 특히 그들이 자립 능력이 없거나 임종에 가까운 병을 앓을 때, 그들을 제거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은밀한, 덜 심각하거나 덜 실제적이지 않은, 그러한 안락사의 형태들 앞에서 침묵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이식용 장기의 활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증자의 죽음을 검증할 객관적이고도 적절한 기준을 지키지 않고 장기들을 제거하는 경우에 그러한 형태의 안락사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16. 오늘날 생명에 대한 위협과 공격을 정당화하는 데 자주 이용되고 있는 현상은 인구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양태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부유한 선진국에서는 출산율의 심각한 저하 또는 폭락 현상이 일어나는 반면에 가난한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낮은 경제, 사회 성장률 속에서, 특히 극도의 저개발 상태에서는 그러한 인구 증가율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의 인구 과잉 현상에 대해서, 진지한 가정과 사회 정책들이나 문화 개발 계획과 자원의 정당한 생산과 분배 계획 등과 같은 국제 차원의 범세계적 중재 대신에 출산 억제 정책들이 계속해서 수립되고 있습니다.
    피임, 불임시술, 낙태 등이 어떤 경우에 급격한 출산율 하락의 부분적 원인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인구 폭발"이라는 상황 속에서는 그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해서 생명을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수가 늘어간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던 늙은 파오는 온갖 종류의 박해를 가했으며, 히브리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출애 1,7-22 참조). 오늘날 지구상의 적지 않은 수의 권력자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현재의 인구 성장이라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가장 인구 증식이 빠르고 가난한 민족들이 자기 나라의 복지와 평화에 대한 위협을 주고 있다고 두려워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개인과 가정의 존엄성과 모든 인간의 침해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여 이 심각한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대규모의 출산 통제 계획을 촉진하고 강요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들이 제공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제 원조까지도 출산 억제 정책을 받아들일 때에만 제공한다는 부당한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17. 생명에 대한 공격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가 하는 것뿐 아니라, 그러한 공격이 차지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수적 비율과,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 분야의 공감대로부터 그 공격이 얼마나 폭넓고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격들이 폭넓은 사회적 공감대로부터, 폭넓은 법적 승인과 참여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인류가 보여주는 모습은 참으로 위험하고 긴박한 것입니다.
    본인이 덴버의 "제8차 세계청소년대회"에서 단호히 천명했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에 대한 위협들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그 위협들은 막대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힘들 또는 '아벨들'을 죽이는 '카인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들은 과학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계획된 위협들입니다. 20세기는 생명에 대한 집단적인 공격의 시대가 되고 말 것이며, 끊임없이 일련의 전쟁들과 죄없는 인간의 생명을 끊임없이 빼앗는 시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15) 특히 연대의식이라는 미명하에 제시되어 때로는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다양한 그 의도들은 제쳐두고라도, 우리는 실제로 객관적인 "생명에 대한 음모"와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음모에는 심지어 국제적인 기구들까지 가담하여, 피임, 불임시술, 낙태들이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실제적인 운동을 고무하고 수행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매스 미디어도 자주 이러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매스 미디어는 피임, 불임시술, 낙태, 심지어 안락사까지도 진보의 표지와 자유의 승리로서 제시하는 그런 문화에는 공신력을 실어주면서, 반면에 무조건적으로 생명을 옹호하는 입장들은 자유와 진보의 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자유에 대한 그릇된 개념

    18. 묘사된 이 사건의 전모는 거기에 특징을 부여하고 있는 죽음의 현상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그 사건을 결정짓는 다양한 원인들 안에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4,10)고 하신 주님의 질문은 카인에게 자신의 살인행위가 지닌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라는 초대처럼 보입니다. 그리하여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한 모든 중대한 동기들과 그 행위에 동서 나온 결과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생명을 거스르겠다는 결정은 곤경이나 비극적인 상황들, 즉 심한 고통, 고독, 경제 전망의 총체적인 결핍, 좌절과 미래에 대한 근심 등의 상황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그 자체로는 죄악인 그 결정들을 내린 사람의 주관적 챔임과 결과적인 범죄성을 상당한 정도까지 감면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 상황들에 대한 불가피한 인식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문제로서, 거기에는 앞에서 말한 생명에 대한 범죄들을 개인적 자유의 정당한 표현들로 해석하고, 그리고 실제적인 권리로서 인정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더욱 폭넓게 퍼진 경향 안에서 가장 사악하고도 혼란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랜 역사적 과정은 비극적인 결과들을 수반하면서, 이제 전환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일단 "인권"-모든 개인들이 본래적으로 지닌 권리이며 어떤 헌법과 국가의 법령보다 앞서는 권리들-이란 개념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이 과정은 오늘날에 와서 놀라운 자기 모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침해할 수 없는 권리들이 엄숙하게 선포되고 생명의 가치가 공적으로 인정되는 바로 그 시대에 생명의 권리 자체가, 특히 존재의 가장 중대한 순간에, 즉 탄생과 죽음의 순간에 부정되거나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인권에 대한 여러 가지 선언들과, 이 선언들의 정신에 고취된 많은 자발적인 활동들은, 인종, 국적, 종교, 정치적 견해, 사회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이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더욱 각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고결한 선언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비참하게 거부됨으로써 불행하게도 모순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를 더욱 비참하고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인권의 확인과 보호를 자신의 최우선 목표와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회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원칙을 거듭해서 천명하는 일과 인간 생명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가 꾸준히 증가하며 널리 확산되는 일이 어떻게 양립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한 선언들과, 약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 또는 노인, 또는 갓 잉태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행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공격들은 직접적으로 생명 존중을 거스른 공격이며, 인권에 관한 문화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민주적인 공존의 의미 자체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위협인 것입니다. 우리의 도시들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가 되기보다는 거부당하고, 소외되고, 뿌리뽑히고, 억압당한 사람들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넓은 세계적인 시야로 볼 때, 만일 우리가 부유한 나라들의 이기주의적인 가면을 벗기는 데 실패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유명한 국제 회의들이 만든 개인과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단순히 알맹이 없는 수사학 연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이 개발에 접근하는 것을 배제시키거나 또는 그러한 접근을 개발과 인간 사이에 대립관계를 성립시키는 독단적인 출산 억제를 조건으로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나라들이 흔히 채택하고 있는, 국제적인 압력과 조절 형태의 한 결과로서 불의와 폭력이 만연한 상황들을 일으키고 악화시키며,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격하되고 짓밟히는 경제 모델들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19. 이러한 엄청난 모순의 뿌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주체성의 개념을 하나의 극단으로 몰아가고 심지어는 왜곡까지 하며 그리고 완전하거나 적어도 초보적인 자율성이라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을, 그리고 남에 대한 전적인 의존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만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비롯하여 문화적 도덕적 특성을 전반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우리는 그 모순의 뿌리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과 "이용해서는 안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고양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인권에 관한 이론은 바로 인간의 인격이 동물이나 사물과 달리 타인의 지배에 종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언어적이고 명시적인, 또는 적어도 인지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에 따른다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나 또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사회 구조상 약한 구성원인 모든 사람들이 설 자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남의 뜻에 맡겨져 철저히 그들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리고 오직 깊은 애정을 지닌 침묵의 언어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설 자리도 없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경우에 인간 상호 관계와 사회생활 안에서 선택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힘의 논리"가 "이성의 힘"으로 대체된 하나의 공동체로서, 역사적으로 천명하려고 노력했던 바대로, 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인권에 대한 엄숙한 선언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를 거부하는 비극 사이의 모순이 지닌 뿌리는 자유의 개념 안에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고립된 개인들을 절대적으로 고양하면서, 연대성, 타인에 대한 개방성, 타인에 대한 봉사 등에게는 어떠한 자리도 내어주지 않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나 임종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때로는 이타주의나 인간적인 동정에 대한 몰이해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러한 죽음의 문화는 완전히 개인주의적인 자유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결국 복종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약자 위에 군림하는 "강자"의 자유가 되고 맙니다.    
    카인은 바로 이런 의미로 주님의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나는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형제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서로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내재적으로는 이성적인 차원을 지닌 자유를 주신 것도 이처럼 서로에게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창조주께서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에게 개방함으로써 자아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절대화할 때, 그 본래의 내용이 사라지며, 그 의미와 존엄성은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강조해야 할 더욱 심오한 측면이 또 있습니다. 자유와 진리 사이의 본질적인 결합을 더 이상 인정하고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자유는 그 자체를 무효화하고 파괴하며, 타인에 대한 파괴로 인도하는 요소로 변질되고 맙니다. 스스로 모든 형태의 전통과 권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에, 자유가 개인과 사회가 살아가는 토대인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가장 명백한 증거조차도 차단해 버릴 때, 인간은 자기 선택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점으로서 선과 악에 관한 진리를 더 이상 채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주관적이고 변화 가능한 견해나 또는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과 변덕만을 기준점으로 삼게 됩니다.

   
20.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사회 안에서 생명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초래합니다. 자아의 증진을 절대적인 자율성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서로를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사회란, 서로서로 곁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상호 결합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개인들의 집단이 되어갑니다. 각 개인은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며, 실제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시도합니다. 더구나 각 개인들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원한다면, 타인들의 비슷한 이익에 직면해서 일종의 타협도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모든 이를 위한 공동선과 절대적 진리의 기준이 상실되며, 사회생활은 완전한 상대주의라고 하는 유동적인 모래 위에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흥정할 수 있습니다. 기본권 중에 가장 중요한 생명에 대한 권리조차도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정치와 통치의 차원에서도 일어납니다. 즉 원초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의회의 표결에서 또는 국민 일부분-비록 그 일부가 다수라고 할지라도-의 의지에 입각해서 문제시되거나 거부됩니다. 즉 "권리"는 본의미의 권리이기를 멈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에 그 굳건한 토대를 두지 않고, 힘이 강한 편의 의지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민주주의는 자신의 원칙들을 거부하면서, 실제적으로 일종의 전체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국가는 더 이상 근본적 평등의 원칙들이라는 기초 위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의 가정"이 아니라, 전제 군주 국가로 변형됩니다. 이러한 국가는, 태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장 약하고 가장 보호 능력이 없는 구성원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은 공동 이익이라는 구실을 대지만 사실 그것은 일부의 이익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법칙들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따라 행해진 투표 결과에 의해서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법률적 허용이 이루어질 때, 합법성을 엄격하게 존중한다는 외관만은 유지됩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실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합법성에 대한 희화적인 묘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호할 때에만 참된 것일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그 기초에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살해가 자행되는 지금 어떻게 모든 인간 인격의 존엄성에 대해서 여전히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의라는 이름으로 극도의 불의가, 즉 어떤 사람들은 보호할 가치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존엄성을 부인 당하는 차별들이 자행되고 있는데 말입니다."16)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참된 인간 공존의 붕괴와 국가의 해체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낙태, 유아 살해, 안락사의 권리를 주장하며, 그러한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그릇되고 사악한 의미, 즉 타인 위에 군림하는, 타인에 대항하는 절대적인 힘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된 자유의 죽음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요한 8,34)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창세 4,14):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

    21.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사이의 투쟁이 지닌 깊은 뿌리를 찾는 과정은, 앞에서 언급한 그릇된 자유의 이념 안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대인들이 체험하고 있는 비극의 핵심으로 파고들어 가야 합니다. 그 비극이란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문화적 풍조의 전형인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입니다. 세족주의는 도처에 존재하는 그 촉수들을 가지고 때때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까지도 시련에 빠지게 합니다. 이러한 풍조의 영향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은 비극적인 악순환에 쉽게 빠져들게 됩니다. 즉 하느님 의식이 실종될 때, 인간의식, 그 존엄성과 생명의 의식이 사라지는 경향도 생겨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도덕률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 특히 인간 생명과 존엄성에 관한 중대한 문제에 대한 공격은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존재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카인이 자기 아우를 죽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주를 내리신 후에 카인은 주님께 말합니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세 4,13-14). 카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하느님을 뵙지 못하게"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카인이 자신의 잘못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그리고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죄가 지닌 중대성을 완전히 깨닫는 것은 진정 오직 주님 앞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다윗이 체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눈앞에서 죄를 저지른 후에 예언자 나단의 질책을 받고 나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사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것을 제가 행하였사옵니다."(시편 51,5-6)라고 외칩니다.

   
22. 결과적으로, 하느님 의식이 사라지면 인간 의식도 위협받고 훼손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천명합니다.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 자체의 정체도 어두워지고 만다."17) 더 이상 인간은 자신을 다른 피조물들과 "신비하게 다른" 존재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을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의 하나로, 기껏해야 완전의 아주 높은 단계에 도달할 유기체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본성이 지닌 협소한 지평에 갇힌 인간은 어느 면에서 자신을 "사물"로 격하시켰으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실존"이 지닌 "초월적인"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더 이상 하느님의 빛나는 선물로, 자신의 책임에 맡겨진, 따라서 사랑으로 보살피고 "존중"해야 할 "신성한"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생명 그 자체는 단순한 "사물"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 생명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자신의 통제와 조작에 완전히 속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이제 인간은 탄생과 죽음의 순간에, 생명에 관해 자기 실존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를 가지고 자기 역사상의 결정적인 이 순간들에 순응하지도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행위"에만 관심이 있으며, 모든 종류의 기술을 사용해서 탄생과 죽음을 계획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기에만 바쁩니다. 탄생과 죽음은 "살아내야 할" 최우선적인 체험이 아니라 단순히 "소유"하거나 "거부"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가 제거된 뒤에는, 모든 사물들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왜곡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제 자연 자체가 어머니(mater)인 존재에서 "물질(matter)"인 존재로 격하되었으며, 모든 종류의 조작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문화에 만연한 일종의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인정해야 할 창조의 진리가 존재한다거나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법 없는 자유"의 결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자유 없는 법"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게 될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에 간섭하는 것을 불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념들이 실제적으로 자연을 "신성화"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연이 창조 계획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로운 계획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혼돈의 뿌리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상실이 인간을 규율없는 자유로 이끌어갈 때도 그렇고, 인간을 자신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상태에 처하게 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세계와 자기 존재의 신비에 대한 시각도 함께 잃게 됩니다.

   
23.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은 실천적 유물론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 유물론은 개인주의, 실용주의, 쾌락주의를 낳습니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사도의 말씀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로마 1,28). 소유 가치가 존재 가치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목표는 자기 자신의 물질적 안락뿐입니다. 이른바 "삶의 질"이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경제적 효율성, 무절제한 소비주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쾌락으로 해석되며, 인간 상호간의, 영적, 종교적 차원과 같은 실존의 더 심오한 차원들은 무시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 실존의 피할 수 없는 짐이면서 동시에 인격 성장의 가능성에 필요한 요소이기도 한 고통은 불필요한 것으로 "삭제"당하고 거부당하며, 실제로 항상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해야 할 악으로 반대를 받습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고, 가까운 미래의 안락에 대한 기대조차 가질 수 없다면, 생명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여겨지며, 그 생명을 억눌러 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싶은 유혹이 자라납니다.
    이와 같은 문화 풍조 안에서 육체는 더 이상 고유한 인격적 실재로, 타인과 하느님과 세계와 관계를 맺는 표징과 장소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육체는 단순히 기관과 기능과 에너지의 복합체로서 쾌락과 효율성이라는 유일한 판단 기준에 의거해서 사용될 뿐입니다. 따라서 성(sexuality) 역시 비인간화되고 착취당하게 됩니다. 즉 성은, 다른 모든 타인들의 인격적인 풍요 속에서, 자아를 주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표징이며 장소이고 언어였던 위치에서 점차로 격하되어, 자기 주장과 개인적 욕망과 본능의 이기적 만족을 위한 기회와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성이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는 뒤틀리고 왜곡되었으며, 부부행위에 내포된 합일과 출산이라는 두 의미는 인위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혼인 유대는 버림을 당하고, 혼인 유대의 충만성은 부부의 변덕에 종속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산은 성행위에 있어 피해야 할 "적"이 되었습니다. 출산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오직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아이를 가지겠다는 욕망 또는 의도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며, 따라서 아이로 표현되는 생명의 충만성에 대한 개방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묘사한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상호관계는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여성, 어린이, 병자 또는 고통받는 사람, 그리고 노인들입니다. 존중, 관대함과 봉사를 요구하는 인간 존엄의 가치 기준인 인격적 존엄성은 효율성, 가능성, 유용성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타인들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가."하는 것 때문에 존중합니다. 이것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우월성입니다.

   
24.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이 생명에 대한 다양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수반하여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윤리의식의 핵심에 대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홀로 독특한 존재로 서있는 개인 양심의 문제입니다.18)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 "윤리의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어떤 면에서 사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가 생명에 반하는 행위들을 용인하고 조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을 거스르는 실제적인 "죄의 구조들"을 만들어내고 강화하는 "죽음의 문화"를 고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윤리의식은 모두 극도로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침투력이 강한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즉 생명에 대한 기본권과 관련해서 선과 악을 혼동하는 위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세계의 대부분은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묘사하고 있는 인간과 같은 슬픈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세계는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들"(1,18)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부인하고, 하느님 없이 스스로 지상의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은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1,21). 그리고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으며"(1,22) 마땅히 죽어야 할 만한 일들을 하면서,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들을 행하는 남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1,32). 양심이라는 이 영혼의 밝은 등불이(마태 6,22-23 참조)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이사5,20)고 할 때, 그것은 가장 위험한 부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며, 가장 어두운 도덕적 맹목의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려는 온갖 통제와 노력은 각자의 양심 안에 메아리 치는 주님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못합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사랑, 개방성과 봉사의 새로운 여정이 출발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이 양심이라고 하는 내밀한 지성소입니다.

   
"여러분이 와있는 곳은 속죄의 피가 뿌려진 곳입니다"(히브 12,22.24 참조): 희망의 표징과 헌신에 대한 초대

    25.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생명의 원천이며 옹호자이신 하느님께 울부짖고 있는 것은 첫 번째로 살해된 무고한 사람인 아벨의 피뿐만이 아닙니다. 아벨 이후로 살해된 다른 모든 인간들의 피도 역시 주님께 부르짖는 목소리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그리스도 피의 목소리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울부짖고 있는데, 아벨은 그 무죄함에 있어 그리스도의 예언적인 형상입니다. "여러분이 와있는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서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12,22.24). 그것은 뿌려진 속죄의 피입니다. 구약 희생제사의 피가 이 피의 상징이며 예언적인 표징입니다. 이 희생제사로써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정화하시고, 성별하시려는 당신의 뜻을 표현하셨습니다(출애 24,8; 레위 17,11 참조). 이제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실현되었습니다. 그분의 피는 구속하고, 정화하고, 구원하는 뿌려진 속죄의 피입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마태 26,28) 신약의 중재자의 피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이 피는(요한 19,34 참조) 아벨의 피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과연 이 피는 더욱 근본적인 "정의"를 표현하고 요구하며, 무엇보다도 자비를 탄원합니다.19) 이 피는 성부 앞에서 형제들을 위해서 중재 역할을 하며(히브7,25 참조), 완전한 구속의 원천이며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위한 원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한편으로 성부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인간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무한한 것인가 하는 것도 보여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1베드 1,18-19). 신앙인은 바로 이 귀중한 그리스도의 피,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표징(요한 13,1 참조)을 묵상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지닌 거의 신성에 가까운 품위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더욱 새로워지고, 감사하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으니'(부활 성야의 부활 찬송),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으니'(요한 3,16 참조) 창조주의 눈에 인간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20)
    더구나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위대함과 그에 따른 소명이 자신을 진실로 내어주는 것임을 인간에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생명의 선물로서 뿌려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피는 더 이상 죽음의 상징이나, 형제들과의 영원한 분리의 표징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생명이 지닌 풍요로움인 일치의 도구인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이 피를 마시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누구나(요한 6,56 참조) 그분의 사랑과 생명의 선물이 지닌 활력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며, 모든 사람들이 지닌, 사랑에 대한 원초적인 소명을 다시 일깨우게 됩니다(창세 1,27; 2,18-24 참조).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생명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희망의 가장 힘있는 원천은 바로 이 피이며, 실제로 이 피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생명의 승리를 거두리라는 절대적인 확신의 토대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의 하느님 옥좌로부터 들려오는 큰 음성이 "이제는 죽음이…… 없을 것이다."(묵시21,4) 하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성 바오로는 죄에 대한 지금의 승리는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의 표징이며, 그것을 앞당기는 것이라고 보장합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갔느냐?'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1고린 15,54-55).

   
26. 실제로 우리 사회와 문화들이 강력한 "죽음의 문화"의 표지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 이러한 승리를 가리키는 표징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만일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긍정적인 표징들을 함께 제시하지 않고 생명 위협에 대한 비난만 제시한다면, 그것은 헛된 낙담으로 이끌 수 있는 일면적인 모습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긍정적인 표징들을 발견하는 것은 흔히 어렵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긍정적인 표징들이 의사 전달 매체들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약하고 보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돕고 지원하려는 자발적인 움직임들이 얼마나 많이 생겨났고 또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일반 사회 안에서,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개인, 단체, 다양한 종류의 운동 단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직도 많은 부부들은 관대한 책임감으로, 자녀를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21)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일상의 봉사 안에서, 버려진 아기들과, 어려움에 빠진 소년소녀와 십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가정들도 없지 않습니다. 많은 생명 후원 센터들과 유사한 기구들은 개인과 단체들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단체들은 놀랄 만한 헌신과 희생으로, 곤경에 처한 어머니들과 낙태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어머니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가족이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일 준비를 갖춘 자원 봉사자 단체들이 점차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가족이 없는 이 사람들은 특히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거나, 파멸적인 습관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도와줄 환경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의학은 전문 연구자들과 임상 의사들의 헌신에 힘입어 더욱 효과적인 처방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태아와 고통받는 사람들과 급성 질병, 또는 질병의 말기 단계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 치료법들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장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기관과 조직체들이 빈곤과 풍토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나라들에게 가장 진보된 약품의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국가와 국제 차원의 의사협회들은 자연 재해, 풍토병, 또는 전쟁으로 시달리는 민족들을 신속하게 구조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의료 자원의 공정한 국제적 재분배를 실현하는 일이 아직 멀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진척되어 온 단계들 안에서, 민족들간에 증가해 가는 일치와, 칭찬할 만한 인간적이고도 도덕적인 감수성과, 생명에 대한 더 뛰어난 존중의 표징들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27. 낙태 허용법에 대응하여,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안락사 합법화 노력에 대응하여, 생명 옹호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일깨우기 위한 운동과 자발적 움직임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단호하게 활동할 때, 생명의 가치에 대한 더 폭넓고 더 심오한 의식을 증진시키며,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더욱 결연히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환기시키고 불러일으킵니다.
   
나아가서, 개방과 희생과 이타적인 보살핌을 위한 모든 일상적 행위들을 어찌 언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가정, 병원, 고아원, 양로원,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다른 센터나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그러한 행위들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29-37 참조)인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힘을 받아서, 자비로운 도움을 제공하는 일에 언제나 앞장서 왔습니다. 많은 교회의 자녀들, 특히 남녀 수도자들은, 전통적이며 전혀 새로운 형태들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해 왔고, 계속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위한 사랑, 특히 약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자유로이 바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사랑과 생명의 문명"의 토대들을 굳건하게 하는데, 이러한 토대 없이는 개인과 사회 생활은 그 가장 참된 인간적인 본질을 잃게 됩니다. 비록 대다수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추어진 채로 있다고 해도,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 6,6) 아버지께서는 장차 이러한 행위들을 보상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한 항구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희망의 표징들 안에, 민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전쟁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새로운 의식이 여론의 다양한 차원들 속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새로운 의식은 무장 침략자에 대항하는 효과적이면서도 "비폭력적인" 수단을 찾으려는 경향으로 두드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 사형을 일종의 "정당 방위"라고 하는 경우에조차도, 사형제도에 대한 공적인 반대가 커지고 있다는 징후가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는 범죄자들의 갱생 기회를 결정적으로 박탈하지 않고도 그들이 해를 끼칠 수 없게 함으로써 범죄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수단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반가운 표징은 특히 선진사회에서, 삶의 질과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제 생존문제들보다는 생활 여건의 전반적인 개선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다시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 윤리학(bioethics)이 탄생하고 더욱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 사이에,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근본적 쟁점들을 포함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더 많은 반성과 대화를 촉진시키고 있습니다.

   
28. 빛과 그림자를 동반한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선과 악, 죽음과 생명,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의 엄청난 극적인 충돌에 직면하고 있음을 충분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러한 갈등을 "대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한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갈등과 관계가 있으며, 우리 모두는 무조건적으로 생명을 옹호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을 가지고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모세의 초대는 우리 모두에게 역시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옵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 30,15.19). 이러한 초대는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사이에서 날마다 선택을 요구받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초대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초대는 더 깊은 수준으로 들어가 철저히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존에 기본적인 방향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며, 주님의 법을 충실하고 항구하게 실천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주 하느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오래 잘사는 길이다"(30,16.19-20).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택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흘러나올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해서 형성되고 양육될 때, 그 충만한 종교적, 도덕적인 의미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른 무엇도 그만큼 우리가 죽음과 삶 사이의 갈등을 긍정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들에 대한 신앙으로 그 갈등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무셨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신"(요한 10,10) 분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이며,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히브 12,24)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신앙의 빛과 능력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이 던지는 도전들에 직면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책임, 곧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고, 경축하고, 그 복음에 봉사할 은총과 책임을 더욱더 잘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계속-->

1. "생명의 복음(Gospel of Life)"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성서에 들어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적인 차원과 상응하는 것이다.
2. 사목헌장, 22항. 
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1979.3.4.), 10항: AAS 71(1979), 285면 참조
4. 위의 책, 14항 : AAS 71(1979), 285면 참조.
5. 사목헌장, 27항.
6. "생명의 복음"에 관해서 주교단에 속한 모든 형제들에게 보낸 서한(1991.5.19.): Insegnamenti XIV, 1(1991), 1293-1296면 참조.
7. 위의 책, 1294면.
8. [가정교서](Gratissimam sane, 1994.2.2.), 4항 : AAS 86(1994), 871면.
9.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 1991.5.1.), 39항: AAS 83(1991), 842면.
10. 각주: 2259항.
11. 성 암브로시오, De Noe, 26; 94-96면; CSEL 32, 480-481면 참조.
12.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7항과 2268항 참조.
13. De Cain et Abel, II, 10, 38: CSEL, 32, 408.
14. 신앙교리성,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 「생명의 선물」(Donum Vitae, 1987.2.22.): AAS 80(1988), 70-102면 참조.
15. 제8차 세계청소년대회(1993.8.14., 덴버), 전야제 기도 중의 훈화, II, 3: AAS 86(1994), 419면.
16.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에 관한 권리와 유럽"에 관한 연구 총회 참석자들에게 한 훈화(1987.12.18.): Insegnamenti, X, 3(1987), 1446-1447면.
17. 사목헌장, 36항.
18. 사목헌장, 16항 참조.
19. 성 대 그레고리오, Moralia in Job, 13,23: CCL 143A, 683 참조.
20.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3.4.), 10항: AAS 71(1979), 274면.
21. 사목헌장, 50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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