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론과 목적론주의
71.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법 사이의 관계―그 내적이고 생생한 핵심은 윤리적 양심 안에 있습니다―는 인간 행위 안에서 나타나고 실현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완성에 이르는 것은 분명 그 행위들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신 창조주를 찾고, 자유로이 그분께 나아가 완전하고도 복된 완성에 이르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입니다.1)
인간적 행위들은 이를 행하는 개인의 선악을 표현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모두 윤리적 행위가 됩니다.2) 인간적 행위는 인간 외부의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이고 이를 행하는 사람을 윤리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내밀한 영적 특성을 이룸으로써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에 대해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천명하였습니다. “변화와 생성에 종속된 모든 것들은 무상합니다.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더 좋게나 더 나쁘게 끊임없이 변합니다. …인간 생활은 언제나 변화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새롭게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하지도 불변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생은 육체적 탄생처럼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의 부모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낳기 때문입니다.”3)
72. 행위의 윤리성은 인간의 자유가 진정한 선과 맺는 관계로부터 규정됩니다. 이 선은 자연법처럼, 모든 존재를 그 목적으로 향하게 하신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설정됩니다. 이 영원한 법은 인간의 자연 이성(그래서 그것을 “자연법”이라 합니다)과―온전하고도 완전하게―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그래서 그것을 “신법”이라 합니다)에 의해서 인식됩니다. 자유의 선택이 인간의 참된 선과 일치되고 따라서 사람이 그 최종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나타낼 경우에 그 행위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 됩니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 자신이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완전하고도 충만한 행복을 발견하는 최고선입니다. 젊은이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의 첫째 질문,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태 19,16)라는 말은 즉시 인간적 행위의 윤리적 가치와 인간의 최종 목표 사이의 본질적인 관련성을 밝혀줍니다. 예수께서는 대답을 통하여 젊은이의 확신을 굳혀주십니다. “선하신 오직 한 분”이 명하신 선행의 실천은 영원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입니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예수께서 계명을 언급하여 하신 말씀은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이 하느님의 법을 존중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적 선을 지켜줍니다. 선과 일치하는 행위만이 생명에 이른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선을 향하도록 하는 인간적 행위를 이성적으로 이끌고, 이성이 인식한 선을 자원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윤리성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행위는 단순히 이러저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아니면 행위자의 의향이 선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4) 사람의 의지를 그 최종 목표로 향하도록 하고, 구체적인 행위가 인간선 즉, 이성에 의해 참된 선으로 인식된 선과 일치할 때 비로소 인간적 행위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 됩니다. 만일 구체적 행위의 대상이 사람의 참된 선과 일치를 이루지 못할 경우, 그 행위의 선택은 우리의 뜻과 우리 자신을 윤리적으로 악한 것이 되게 하며, 우리의 최종 목표, 최고선 즉 하느님 자신과 대립하게 합니다.
73.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시와 신앙에 의해 행위의 윤리성을 특정 짓는 “새로움”을 의식합니다. 인간 행위들은 은총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존엄성과 소명에 일치하는지 아니하는지를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창조물”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행위를 통하여,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로마 8,29 참조) 성자의 모습과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보여주며, 성령의 선물에 성실한 생활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합니다. 그는 또한 그 행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이루는 빛과 사랑과 행복의 친교에 자신을 열거나 아니면 닫아 버립니다.5)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모상에 따라 우리를 만드신다. 즉 당신 천주성의 모습이 성화와 정의 그리고 덕에 일치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서 빛나도록 하신다. 우리가 행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선함을 드러낼 때, 이 모상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빛난다.”6)
이러한 의미에서 윤리 생활은 본질적으로 “목적론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윤리 생활은 인간 행위가 하느님, 즉 인간의 최고선이며 최종 목표(telos)인 하느님께로 자유로이 나아감에서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다시 한번 젊은이가 예수께 던진 질문,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는 말에서 확인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최종 목표를 향한 정향(定向)은 주관적인 것에 좌우되는 것, 즉 자신의 지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제 조건은 인간 행위들이 인간의 참된 윤리적 선과 일치하고 계명의 지시를 받으면서, 그 자체로 이 목표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젊은이에게 하신 답변,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라는 말씀을 통해 지적하고자 하신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 그러한 정향은 이성적이고 자유로우며, 의식적이고 임의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 있는” 존재가 되며, 의롭고 선하신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상선벌악에 대해 이렇게 충고합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고린 5,10).
74. 그렇지만 인간의 자유 행위의 윤리적 평가는 무엇에 따라 이루어집니까? 인간 행위가 하느님께 정향되어 있음은 무엇으로 확인됩니까? 그것은 행위 주체의 지향과 그 행위의 여건들―그리고 특히 그 행위의 결과들―또는 그 행위의 대상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전통적으로 “윤리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되는 문제입니다. 분명 이 문제에 관하여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로운 또는 새롭게 단장한 신학적․문화적 경향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교도권에게 사려 깊은 식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목적론적”이라고 부르는 어떤 윤리 이론들은 인간 행위가 그 추구하는 목표 및 그 지향하는 가치들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입니다. 행위의 윤리적 올바름을 평가하는 기준은 얻게 될 ‘윤리적이 아닌(nonmoralis) 또는 윤리 이전의(praemoralis)’ 선들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들은 지켜야 할 ‘윤리적이 아닌 또는 윤리 이전의’ 가치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더욱 나은 상태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행위의 옳고 그름이 정해지며, 올바른 행위란 선을 “극대화”하고 악을 “극소화”할 수 있는 행위일 것입니다.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가톨릭 윤리학자들은 실용주의 또는 실리주의와는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한 주의로써는 인간 행위의 윤리성이 인간의 참된 최종 목표와는 상관없이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윤리 생활의 필요 조건들을 정당화하고 그 규범들에 대해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더욱 확고한 이성적 논증을 찾아낼 필요성이 있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 추구는 합법적이고 필수적입니다. 자연법에 의해 세워진 윤리 질서는 인간 이성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원칙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연구는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 비가톨릭인 및 비신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필요성을 충족시켜 줍니다.
75. 그러나 그러한 이성적 윤리(따라서 가끔 “자율적 윤리”라고 부르는)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잘못된 해결책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그것은 윤리 행위의 대상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저자들은, 구체적인 선택에 인간 의지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선택들은 윤리적 선과 사람이 최종 목표를 지향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다른 저자들은 잘못된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받습니다. 그러한 자유의 개념은 자유 행사의 구체적인 조건들, 선에 관한 진리를 성실히 참고함, 그리고 구체적인 행위의 선택을 통한 결정들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설들에의 선택을 통한 결정들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설들에 따르면 자유 의지는 특수한 의무에 윤리적으로 종속되어 있지도 않고, 그 선택에 따라 형성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윤리 규범을 발견하는 한 방법으로 보는 이러한 “목적론주의”는―다양한 사조로부터 받아들인 용어와 접근 방식에 따라―“결과주의” 또는 “비교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어떤 행위의 올바름을 재는 척도를, 주어진 선택으로부터 나온 예상 가능한 결과들의 총체에서 끌어냅니다. 후자는 실제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더 큰 선” 또는 “더 작은 악”의 관점에서, 추구하는 여러 가지 가치와 선을 따져봄으로써 그 선택의 선한 결과와 악한 결과 사이에 있는 비율에 초점을 맞춥니다.
목적론적 윤리 가설들(비교주의, 결과주의)은 이성과 계시에 이해 윤리적 가치들이 의의를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상황과 모든 문화에서 그 가치들을 거스르는 개별 행위의 절대적인 금지를 정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행위 주체는 추구하는 가치들을 얻는 데 실제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인간 행위에 포함된 가치와 선들이(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정의 등과 같은 고유한 윤리적 가치들과 관련되어) 윤리적 질서로부터 나온다는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이를테면 건강과 건강의 손상, 신체적으로 온전함, 생명과 죽음, 재화를 잃음 등, 그 행위와 관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해<利害>와 관련되어) 윤리 이전의 질서―“윤리가 아닌, 물리적인, 또는 존재적인 질서”라고도 할 수 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선이 항상 악과 섞여 있는 세계에서, 그리고 선한 결과가 악한 결과들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세계에서, 행위의 윤리성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선함”은 행위 주체가 윤리적 선들을 참고하여 마음으로 정한 지향에 기초를 두고 판단되며, 그 “올바름”은 예측 가능한 결과나 효과 또는 그 비율에 기초를 두고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행위들은, 이를 선택한 사람의 의지가 윤리적으로 “선하다” 또는 “악하다”고 판단되기 이전에, “옳다” 또는 “그르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라면, 만일 행위 주체의 지향이, 구체적인 행위에 관련된 선들의 “책임 있는” 평가에 따라 그 상황에 결정적이라고 판단되는 윤리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면, 보편적인 금지 규정에 반대되나 “윤리 이전의” 선이라고 볼 수 있는 선들을 직접 침해하는 행위까지도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행위와 결과 사이, 그리고 결과들 사이의 비율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단지 “윤리 이전의” 질서만을 중시할 것입니다. 행위의 윤리적 특수성, 즉 그 선함과 악함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인 사랑과 현명함에 얼마나 성실했는지만을 가지고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성실성은 개별적인 윤리 계명에 반대되는 선택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가 필요 없습니다. 중대한 사안의 경우 이러한 윤리 계명들은 항상 상대적이고 따라서 예외가 인정되는 실제적 규범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로서는, 전통적인 윤리신학이 불법이라고 천명한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동의를 객관적인 윤리적 악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행위의 대상
76. 이러한 가설들은 그 과학적 사고 방식 때문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원과 이익, 과정과 결과들에 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하여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행위들을 정립하는데 올바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고 임의적인 윤리 의무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해방은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맙니다.
그것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성실한 이론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법과 자연법의 계명들과 반대되는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들을 윤리적으로 선한 것처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가톨릭 윤리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 윤리 전통이 비록 구체적인 상황에서 선을 이룩하는 최선책들을 찾으려는 결의론(決疑論)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이 결의론은 오직 법이 불확실한 경우에만 해당되며, 예외 없이 의무를 부과하는 윤리적 금지 계명들의 절대 유효성은 문제삼은 적이 없습니다. 신자들은 창조주시고 주님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가르치고 선언한 특별한 윤리 계명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7) 사도 바오로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율법의 완성을 개괄하였을 때(로마 13,8-10 참조), 그는 계명들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강화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와 그 중대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선물로 새로워진 계약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사도 4,19; 5,29 참조), 그리하여 순교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예입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의 여러 인물들은 신앙이나 덕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기보다는 기꺼이 그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성인으로 받들어 모십니다.
77. 앞에서 말한 이론들은, 올바른 윤리적 결정을 위한 이성적 기준을 제공하기 위하여 인간 행위의 지향과 결과들을 고려합니다. 분명 지향과 함께 행위의 결과들, 즉 선을 이루고 악을 피한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음은 소홀히 하고 외적인 행위들만을 장황하게 규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강력하게 반대하셨습니다(마르 7,21; 마태 15,19 참조). 책임 역시 크게 요구됩니다. 그러나 구체적 선택의 윤리적 성격을 판단하기 위해서는-지향뿐 아니라-결과들을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결과로서 예상가능한 선과 악을 저울질해 보는 것은 그 구체적인 행위의 선택이 “그 자체로”(secundum specium suam) 윤리적으로 선한지 악한지, 불법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적합한 방법이 아닙니다. 예상 가능한 결과들은 행위의 조건들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악한 행위의 경중을 변경시킬 수는 있지만, 그 윤리적 행위의 종류(악) 자체를 변경시킬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 행위의 선하고 악한-윤리 이전의 선악-모든 결과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바입니다. 완전 무결한 이성적 계산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명하지 않은 기준에 의한 평가로써 비례를 확립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처럼 논란의 여지가 많은 계산을 가지고 절대적인 의무를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78. 인간 행위의 윤리성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이성적으로 선택된 “대상”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성 토마스가 밝혀낸 것으로서,8)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윤리적으로 그 행위를 규정짓는 행위의 대상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행위자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지 행위의 대상은 자유로이 선택한 행위 자체입니다. 그것이 이성의 질서와 일치하는 한 그것은 의지의 선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윤리적으로 완성시키며 완전한 선, 즉 원초적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최종 목적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가능성만 가지고 평가하는 과정 또는 단순히 물리적 질서에 속하는 사건을 윤리 행위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대상은 자유로운 결정의 가장 가까운 목적이며, 행위자의 의지는 자유로운 결정의 원인이 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선택하면 항상 잘못을 범하게 되는 특수한 행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택은 의지의 무질서, 즉 윤리적 악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9) 성 토마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좋은 지향으로 행동하지만 선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이익이 전혀 없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지향은 좋지만, 바른 의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한 지향만 가지고 행한 악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예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단죄를 받아 마땅합니다’(로마 3,8).”10)
선한 지향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행위의 올바른 선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 행위가 그 대상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선하신 오직 한 분” 하느님을 향하고 있든지 아니면 거스르고 있든지 하며, 그리고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주든지 방해하든지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윤리적으로 관련된 선들이 보존되고, 대상이 그 사람의 선과 일치할 때 비로소 그 행위는 선이 됩니다. 윤리적 대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교 윤리는 인간의 참된 선을 증진하는 한 행위의 내적 “목적론”을 고려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윤리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존중될 때에만 그러한 목적론이 권장할 만하다고 봅니다. 그 대상에 따라 선한 인간 행위는 최종 목적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의지가 실제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행위를 이끌 때에 비로소 그 행위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윤리신학자들과 고해사제들의 수호자이신 성 알퐁소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선행은 올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선하고 완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유일한 지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11)
“내적인 악”: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 3,8 참조)
79. 어떤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을, 그런 선택을 하게 한 지향 또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예상 가능한 행위의 결과들은 고려하지 않고서, 그 유(그 “대상”)에 따라 윤리적으로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것은 목적론적 이론과 비교주의 이론의 특징입니다-은 배격되어야 합니다.
윤리적 판단의 우선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 행위의 대상이며, 이것이 선과 최종 목표(하느님)를 향하고 있는지를 판단합니다. 이러한 정향은 인간 존재 안에서 이성에 의해 파악되며, 온전한 진리 안에서, 따라서 그 자연적인 성향과 동기 그리고 목적성 안에서 고찰됩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영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이러한 것들이 자연법의 내용이며, “사람의 선”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위한 선들”의 복합체입니다. 사람 자신과 그 완성이 바로 선입니다. 이 선들은 하느님의 법에 의해 보존되며, 자연법 전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12)
80. 이성은, 그 본성상 하느님께 “향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대상들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상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의 선과는 근본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교회의 윤리적 전통에서는 “내적으로 악한 것”(intrinsece malum)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그리고 그 자체로, 다시 말해 그 대상 자체 때문에, 그리고 행위자의 의도나 상황과는 전혀 별개로 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환경과 특히 지향으로부터 받는 윤리성에 대한 영향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면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행위들은 그 내용의 성격상 구체적 상황에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언제나 중대한 잘못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논의하면서 그러한 행위들의 예를 무수히 나열하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유형,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 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등,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실로 파렴치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입니다.”14)
내적으로 악한-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악한-행위에 관하여 그리고 부부 행위를 의도적으로 자녀 출산을 막는 피임 행위로 격하시키는 의료 행위와 관련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가끔은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하여 덜 큰 윤리적 악을 묵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제아무리 중대한 사유가 있더라도 선을 끌어내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것은 결코 정당한 짓이 아닙니다(로마 3,8 참조). 다시 말해 본성상 윤리 질서와 반대되는 것, 그래서 인간이 해서는 안된다고 판단되는 것을 직접 의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록 그 의도가 개인과 가정과 인간 사회의 권익을 보호하거나 증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합니다.”15)
81. 내적으로 (언제나 그 자체로) 악한 행위의 존재를 가르치면서 교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힘주어 단정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1고린 6,9-10).
만일 행위가 내적으로 악하면 올바른 지향이나 특별한 상황은 그 악을 줄일 수는 있으나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악한 행위로 남으며, 그 자체로 그러한 행위들은 하느님이나 인간의 선을 향할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이렇게 썼습니다. “행위 자체가 조악인 이상(cum iam opera ipsa peccata sunt), 예를 들어 도둑질, 간음, 신성 모독 같은 죄를 저지르고서도 감히 선한 동기로(causis bonis) 했으니 죄가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면 더 터무니없이, 그런 죄는 정당한 죄라고 주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16)
따라서 상황이나 지향은 결코 그 대상 때문에 내적으로 악한 행위를, “주관적으로” 선한 행위 또는 선택 가능한 행위로 바꿀 수 없습니다.
82. 그 최종 목표라는 관점에서 사람의 참된 선을 지향할 때 그 지향은 선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에게 당치 않은” 행위들은 항상 그리고 어느 경우에나 선과 상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고 언제나 어느 때나(semper et pro semper), 즉 예외 없이 의무 지우는 규범들은 준수해야 한다고 해서, 바른 지향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본적인 의미를 확립시켜 줍니다.
윤리성의 원천으로서의 대상(선악)에 대한 교리는 계약과 계명, 그리고 애덕과 다른 덕들에 대한 성서적 윤리의 진정한 해설을 도모합니다. 인간 행위의 윤리적 성격은 계명에 대한 성실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복종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행위 또는 구체적 행위의 임의적인 선택을, 그 선택이 이루어지게 하는 지향이나 그 행위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따라올 예상 가능한 모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 단지 그 유에 따라 윤리적으로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의견은 오류로서 배격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인간 행위의 윤리성에 대한 이성적 결정 없이는 “객관적 윤리 질서”17)를 주장할 수 없으며, 예외 없는 구속력을 가진 규범을 제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형제애와 선에 관한 진리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교회적 친교에도 손상을 입힐 것입니다.
83. 인간 행위의 윤리성에 관한 문제, 특히 내적으로 악한 행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인간의 문제 자체, 인간의 진리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 진리로부터 나오는 윤리적 결과들의 문제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인간의 행위에 내적인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르침으로써, 인간의 진리에 온전히 성실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진리를 존중하고, 그 존엄성과 소명을 촉진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앞에서 말한 이론들이 이 진리에 반대되므로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우리는 윤리적 교설들의 오류와 위험에 대해 신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진리’의 매력적인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진리이신 그분 안에서(요한 14,6 참조), 인간은 선한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누리게 될 자유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소명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 아래 종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진리와 자유와 사랑의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법을 참된 인간 자유의 활력으로 존중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을 잘 살피고 꾸준히 지켜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실천에 옮깁니다”(야고 1,25).
발췌: 이동익신부와 윤리신학 카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