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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과 성서 - 구약성서
윤리신학의 성서와의 관련성을 논할 때 성서 사건들의 역사적 배경이나 상황, 그리고 기본적인 모델을 총체적으로 분석, 수용하는 작업 없이 단순히 성서로부터 제시되는 규범들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성서가 “우리들의 영적 생활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 계시의 중요 테마를 파악”1)하는 일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윤리신학에 대한 우리들의 이러한 과제에 대해 간결하지만 매우 분명한 어조로 언급한다. “신학과목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원의 역사와의 관계를 보다 생생하게 유지하도록 재검토해야 하겠다. 특히 윤리신학을 보완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 학술적 해설에 성서의 가르침을 보다 풍부히 가미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받은 성소의 고상함을 깨우쳐주고, 세상 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자들의 의무를 밝혀 주어야 하겠다”(「사제양성에 관한 교령」 16항) 과거에는 이미 확정된 규범들을 실증할 목적으로 성서를 인용하는 일은 불손한 행위였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접근 방법은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의 상황을 이해하고 성서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성서의 총체적 전망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바라다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다음 성서를 통해서 나타나는 규범과 지침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성서의 역사적 배경을 의식해야 할 것이고, 그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창조적 의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구약성서 윤리신학은 구약성서로부터 예리하고도 위대한 시각을 배워야 한다. 특히 구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은 윤리신학의 주제와 여러 면에서 부합되고 또 서로의 주제를 더욱 보충해 준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윤리신학의 주제들은 자주 신약성서와 교회의 역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1.1.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초대 성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밖의 여러 철학자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因果律로서 소개하지 않는다. 성서는 하느님을 창조적인 말씀과 계약으로의 초대라는 전망 안에서 우리에게 소개한다. “하느님이 말씀 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는 창세기의 하느님께 대해 가져야만 하는 가장 위대한 시각이며, 더 나아가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 가장 위대한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로서의 말씀의 주제는 그분의 모습에 따라 그분과 닮게 창조된 인간에 관하여 말할 때 가장 장엄한 순간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서 천주께서 가라사대 사람을 우리와 비슷이 우리 모습대로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길짐승들을 다스리게 하리라 하시고, 천주께서 당신 모습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도다. 천주의 모습 따라 그를 창조하셨도다. 그들을 사내와 계집으로 창조하셨도다” (창세 1,26-27).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은 이 세상을 자유롭게 지배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창조주의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부르신 초대이며, 또한 자유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부르신 초대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로 부르시며, 우리에게 휴식과 평화를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존재가 되며, 즉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찾고 자신의 쉴 곳을 찾는 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1.2. 회개와 구원에로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죄에 물들어 있는 세상으로부터 피신하도록, 그리고 당신께 신뢰를 갖고 충실하도록 노아를 부르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회개에로, 즉 구원에로 초대하신다. 노아의 역사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염려를 상징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구원은 회개와 신뢰라는 일종의 탈출이다. 하느님의 초대와 그분의 은약이라는 선물은 무한히 자비롭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신앙과 회개로써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서는 말한다. (창세기 6-10장) 1.3. 하느님의 초대: 선택과 약속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떠나도록’ 초대 하신다: “너의 고향과 너의 친척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창세 12,1). 하느님의 이러한 부르심은 선택과 약속의 부르심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믿음과 충성을 다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하느님 면전을 순례하는 순례자로서 그분께 대한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그 부르심은 분명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의 축복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의 초대라는 아주 커다란 한 주제가 더욱 더 잘 이해된다. 역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로 이해된다. 하느님은 용기 있는 신앙과, 당신의 부르심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역사를 구성하도록 백성들을 부르시며, 그분과 함께 순례의 여정을 가는 그들에게 그분의 부르심은 항상 선택이요 약속이 된다. 그분은 조상들의 하느님으로 등장하셨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하느님으로 소개되었다2). 구약성서의 족장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사람들로써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온갖 고통과 좌절, 이주에로 불린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1.4. 하느님의 초대: 해방과 계약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의 구원 역사를 드러내 보이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사막에서 홀로 살도록, 당신의 현존을 체험하도록, 그리고 한분이시고 거룩하시며, 해방자이신 당신을 알도록 부르신다. 모세의 역사는 예언자들과 하느님 백성에 대한 충실한 응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의 역사는 추락된 신뢰의 역사와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해방과 구원 행위는 생명의 으뜸가는 기초이다. 이 생명을 위해 하느님은 모세와, 또 당신 백성과 하나의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윤리는 일종의 계약의 윤리3), 감사와 충성으로써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응답, 즉 함께 참여하는 응답으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자유는 항상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통한 감사와 계약에의 충실로부터 보호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역사의 주님으로 드러나시며, 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건들은 백성이 응답함으로써 보호된다. 1.5. 백성의 회개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초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망각하고, 계약에 불충실할 때마다 적들과의 힘든 싸움을 벌이게 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는 자신들의 처지를 체험한다. 그러나 반면 하느님의 자비의 약속에 응답하면서 회개하고 하느님을 부를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탁월한 지도자들을 파견하심으로써 백성들의 어려움을 중재하신다.4) 이는 구약성서, 특히 판관기와 사무엘 상하권의 중요한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을 초대하셨고, 지금은 당신의 강력한 도움을 요청하고 성실하게 당신께 의지하는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정성껏 들으신다. 주님께 자기 자신의 모든 신뢰를 두고, 하느님의 초대에 창조적으로 응답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루어내고 있다. 해방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간의 회개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6. 왕들을 선택하시고 또 쫒아내시는 하느님 구약성서를 통해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각은 권위가 지니고 있는 가치, 그리고 그것의 불확실성이다. 이미 창세기 3,16에서 볼 수 있는 힘의 남용 - 여인을 지배하는 남편 -은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현실과 상징으로 드러난다. 인간이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을 때에는 항상 분열과 파괴의 원인이 되는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세와 사무엘과 같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된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자기 고유의 왕정이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공동선을 위해 헌신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가 넘치는’ 왕국의 확실한 상징이 된 것이다. 순수한 카리스마적 권위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나의 커다란 축복이다. 계속해서 구약성서는 지상 권력의 불확실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 왕들의 전체 역사를 소개한다. 단순히 왕들의 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왕의 권력이 갖는 구조와 표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왕을 원하는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왕정제도는 결국 악의 끊임없는 원천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사무 8장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의도는 평화와 구원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분께서는 사울과 다윗 등 여러 왕들에게, 만일 그들이 계약에 충실히 머무르고, 또 백성들이 당신께 충실히 머물 수 있도록 백성들을 이끄는 한 그들에게 당신의 ‘은혜로운’ 선택이 있고 또 당신의 성령으로 도유되었다는 표지를 보여주는 여러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과 그 왕들의 사제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들의 왕들과도 같이 행동하였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께서는 왕들이 예언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이시고 진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에 열중할 때에는 항상 그들과 함께 계셨다. 왕들이 당신께 충실하고, 정의와 일치, 그리고 평화를 위한 그들의 임무를 잘 수행하는 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축복을 보내셨다. 타락을 가져다주는 분열은 무엇보다도 권위를 남용한 결과로서 드러나며, 이는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의 중요 주제가 되며, 나아가서는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중요 내용 중의 하나이다. 1.7.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부르심과 그들의 응답 우리는 구약성서를 대하는데 있어서 때때로 구약성서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 이해는 반드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성서는 선택된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텍스트와 담화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는 하느님께 대해 온 마음과 열정적인 충성심으로 응답할 준비가 아직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시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까지도 소개한다. 구약성서의 정점(頂点)은 예언자들의 역사로부터 구성된다. 예언자들은 그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신 하느님께 완전히 매료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능력을 백성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로서,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심오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소개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그 시대 사람들의 역사, 기쁨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필요와 희망, 고뇌로부터 떨어져 살았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윤리적 예언자사상의 역사는 현재적 시각과 항상 일치되는 비젼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성(聖)과 선(善)”5)이 그것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를 동시에 경험한다. 정확한 판단력과 용기로써 그들은 상하-좌우 관계, 거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정의, 자비, 평화를 위한 인간의 임무 사이의 종합을 이루어낸 사람들이었다.6) 성 마리아의 다음 노래는 윤리적 및 종교적 예언자 사상이 지니고 있는 역사를 종합한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신 분: 그분의 자비로우심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세세대대로 미치시리라.”(루가 1,49-50) 고아와 과부들, 소외 받는 사람들, 장애자들,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 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무신론을 결코 걷어치우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또한 거룩하신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뽑혔으며,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불러 주십시요. 저를 보내주십시요”. 그들은 파견에 대한 보상으로 보수도 명예도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예언자는 전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봉사에 바쳐진 사람들이며, 자주 고통을 겪어야만 하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아론의 사제 가문이나 레위 족에 속하지 않는 남자 혹은 여자이다. 예언자사상은 제도화된 사상이 아니다. 왕과 세력가들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거짓 예언자들만이 자기네들의 특권적 위치를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예언자들,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사제로서의 참된 임무를 왕들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스라엘의 사제들의 역사는 하나의 비극적 역사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 모세를 보조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아론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으며, 종교를 자신의 고유한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이는 사제 계급이 권력의 상징으로나, 사회적 신분으로 변질될 때에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은 이스라엘이 늘 당신께 대해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원하신다. 사제는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혼신을 다하여 백성들이 하느님을 공경하도록 백성을 가르쳐야만 한다. 사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은혜로운 기억을 간직해야만 하며, 또한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도록 늘 그들을 초대해야만 할 것이다. 사제들이 자신들을 어떤 특수계층에 속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는 그들은 분명 소외될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 대한 어떠한 체험도 얻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지혜라던가 판단력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형식주의나 율법주의에 얽매이게 될 때에는 결국 모든 백성들을 함께 소외시키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창조적 자유의 결핍은 예언자 직이라는 가면을 쓰게 만들 것이고, 예언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그들의 직분을 결국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충성의 표지로서의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신다. 1.8 야훼의 종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윤리-종교적 예언자 사상의 역사에 있어서의 정점은 “야훼의 종” (이사 42,1-9; 49,1-6; 50,4-9; 52,13-53,12)을 선포하는 신명기에서 드러난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모든 국가 중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것이며, 도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을 믿고 충성을 다할 때, 그리고 겸손한 종으로서의 임무, 즉 모든 민족 사이에서 야훼 하느님을 증거 하는 임무를 잘 수행해 갈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스럽고도 축복받는 하느님 현존의 표지가 될 것이다. 예언자적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다: 즉 하느님께서는 결국 하느님과 인간의 종인 ‘한 사람’을 부르실 것이며, 또한 파견하실 것이다. 즉 메시아 안에서의 희망이다. 이분은 모든 국가의 평화, 정의, 일치, 그리고 하느님의 종으로부터 주어지게 될 선물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무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모든 국가, 민족들에게 봉사하는 종이 되라는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1.9 계약과 율법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하나의 계약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하나의 구원 계약 안에서 당신 자신을 약속하신다. 하느님 측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행위와 계약의 선물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의 선물이 부여된다. 그러나 율법이란 계약의 외적인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부산물이 아니다. 율법이란 오히려 계약으로부터 흘러넘치는 그 어떤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감사의 마음으로 계약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수행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는 긴 여정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충실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예언자, 사제 등 이스라엘의 거룩한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인도는 이스라엘과 함께 거룩함에로의 부르심(레위 19장 참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율법이란 선택된 백성의 삶을 고되게 하는 짐이나 강요된 명령이 아니다. 계약처럼, 계약과 함께 그리고 계약에 의해서 율법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기쁨을 누린다. 사제 전승과 예언자 전승에 있어서 좋은 점은 율법의 헛된 반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전승은 계약의 심오한 의미와 축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역사적 상황에 대해 항상 새롭고도 종합적인 해석을 제공해 준다. 예언자들이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책임감을 지니며, 동시에 창조적이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지침, 빛, 그리고 선물로서 율법을 받아들이고 내면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약과 율법을 완성하실 것이며, 계약에 충실하고 책임감을 지니는 한 백성을 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고 성숙시킨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선포가 메시아적 희망의 중심이 되며, 따라서 이 희망은 야훼의 종의 노래 안에서 핵심 주제가 되고 있다. 다음의 텍스트는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일치된 주제가 된다: “장차 시일이 오리니, - 야훼의 말씀이라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의 집안과 더불어 새로운 계약을 맺겠노라. 내가 이들의 조상들을 미쓰라임에서 나오게 하려고 그들의 손을 잡았던 날에 이들과 더불어 맺었던 그 계약과 같은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건만, 그것을 - 나의 계약을 - 그들이 깨뜨렸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 다음 날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집안과 더불어 맺으려는 그 계약은 이러하니 - 야훼의 말씀이라 - 곧 나의 법을 그들의 속 안에 두고 또 그것을 그들의 마음 위에 써 놓겠노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에게 천주가 되고,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되리라. 또 다시는 ‘야훼를 알아 모셔라’ 말하며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와 자기 형제에게 타이르지 않으리니, 이는 그들의 적은 이로부터 그들의 큰 이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잘 알겠음이며 - 야훼의 말씀이라 - 그 까닭은 내가 그들의 허물과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는 내가 기억하지 않겠음이니라” (예레 31,31-34).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할 때, 그리고 유배로 인해 사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실 때 행하셨던 기적들을 다시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 기적들은 모든 이의 집에,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다를 것이며, 그것들은 분명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 완수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을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불어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에제 36,24-27). 이렇듯이 구약성서 전반에 드러나는 주요 시각은 하느님의 은혜가 넘치는 말씀과 행적, 그리고 백성의 기꺼운 수락과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회개의 유일한 ‘기쁜 소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한사람 한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부르심이요 메시지이다. 충실한 응답은 성령의 작업이다. 여기에서 구약성서 전반을 통해서 제시되는 또 하나의 위대한 시각이 자리 잡는다: 생명을 선사하시고 창조성과 충성의 열매를 더욱 성숙시켜 주시는 성령. |
윤리신학과 성서 - 구약성서 - 이동익신부
2005. 3. 31. 오후 11: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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