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행위와 선택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갖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이 하게 되는 선택에 가치를 매긴다. “내가 선택하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질까?”, “(내가, 네가, 혹은 우리가) 이일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또는 “우리가 이것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그 선택의 이유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행동하며, 그러한 선택에는 가치가 선행된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용어가 갖는 평범한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선과 악에 자신의 행동 근거를 두고 있지만, 판단 규범을 설정하는 기준들의 밑바닥에는 행동의 가치들이 아주 세밀하게 분류되며, 혹은 아주 철저하게 극을 이루는 가치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인류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숱하게 많은 아주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선택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매일 매순간의 자그마한 선택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회, 문화 풍습 안에서의 선택의 순간은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아와 전쟁, 그리고 질병 때문에 생겨나는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비롯해서 인간생명에 대한 불경, 또한 소위 말하는 생명윤리와 관련된 숱하게 많은 문제들; 각 세대가 갖는 책임감의 문제들,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을 통하여 야기되는 엄청난 문제들, 폭력 사용의 적법성에 관한 논란과 비폭력을 위한 노력;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시민참여, 권력의 남용에 따르는 문제들, 그리고 자연환경의 파손과 관련되는 문제들, 남과 북의 경제발전의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 이러한 모든 문제들도 엄격하게 말하자면 ‘선택’의 영역에서 파생되어 나타나는 문제들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모든 질문들에 대한 응답은 단순히 그러한 문제들을 일시적인 위기현상으로 여기면서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내맡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며,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의 잘못된 힘에 버려둘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개인적인 만족이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결론 내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러한 문제들은 단순하게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자유에 호소되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사실 위에서 열거한 여러가지 질문들은 좀 더 깊이 있는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인간 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생겨난 일종의 조건이 붙은 자유를 가진 존재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가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의 의무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분별력 없는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는 책임이며, 그 책임은 반드시 의미를 지녀야 한다. 인간이 지니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은 응답을 해야만 하는 하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 응답의 대상, 즉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며, 그러한 응답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성,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의 공동체성이 발전된다. 칸트의 정언적 명령은 윤리적 요구에 대한 극복불가능한 도식을 제공한다: 즉 칸트에 의하면, “너는 행동을 할 때에 너의 행동이 보편적인 법이 돌 수 있기를 항상 원하면서 독자성을 갖고 행동하라”1). 그리고 “너는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통해서처럼 너의 인격을 통해서도 동등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간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행동하라. 그리고 동시에 너의 행동이 하나의 목적이며, 그렇지만 방법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행동하라”.2) 내가 걷는 자유의 길은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리는 자유의 길이다. 이 자유의 세계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닌다. 이러한 전망 안에서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이 난다”라는 표현은 타인의 존재는 본질적인 방법으로는 아닐지라도 다른 여러가지 부차적인 방법으로 각 개인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자유가 지니는 독자적 전망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더 이상 변경 될 수 없는 정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각 개인은 자신이 지닌 자유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지만 결국 그 발전을 가로막는 어떤 존재를 느끼게 되며 자신의 뜻에 반대해서 그 존재가 가지는 의식을 취하도록 강요받는 존재로서의 개인이다.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러한 언급들이 의미하는 것은 자유의 행사에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아주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행위들을 통하여 타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유의 실천을 위해서는 오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생명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한 응답은 어떤 은밀한 공식을 통해서 찾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수학적인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초윤리신학은 실제의 삶으로부터 비록 유리되어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제기될 수 있는 반성을 제시하지만, 각 개인의 결정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따를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결코 책임이 면제되지 않기 때문에 각 개인의 윤리 생활은 항상 불충분하고 무언가 빠져있는 듯한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반성이 따른다. 그러나 그러한 길은 분별력 있는 자유를 실천하는 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윤리라는 것은 인간 공동체적 삶이 지니는 지칠 줄 모르는 풍요로움의 이해 안에서 계속 새롭게 쇄신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란 때로는 위험이 따르고, 또한 비극적인 삶으로도 비추어 질 수 있겠지만, 그 반면에 함께 하는 삶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시야를 넓게 펼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매일 매일의 생활의 역동성을 발견함으로써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실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인간의 윤리생활의 위기로 나타난다. 즉 개인은 타인과의 연대를 잃어가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 개인과 주변 환경, 그리고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해 있는 문화와의 끈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각 개인은 자신의 인간적 주체로서의 모습을 잃어가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 인간은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잔뜩 안고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아이해 때문에 결국 자신의 고유한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며, 그 반면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의 의미만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윤리신학적 반성은 인간이 활동하는 문화적 배경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 윤리신학적 반성은 그것이 마치 행해야 할 행위에 대해서 이미 준비되어 있는 규정, 예를 들자면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다른 방법으로 하라는 등의 교과서적인 지식으로부터 행해지는 순수한 지성적인 영역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3). 만일 윤리학이 우리 인간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하나의 명백하고도 순수한 어떤 가공적인 원리들로부터 선험적으로나 연역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추리적인 증명으로써 그 의미가 찾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윤리학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앙과 자유의 적용과 모험을 요구한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윤리학은 인간의 윤리적 삶을 위한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취급하는 신학의 한 분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추리적인 편견을 반대하는 인간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실 인간은 그가 믿는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중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선포자로서의 공동체의 역할을 행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을 뿐더러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임무를 통해서, 그 임무를 제한하거나 도구화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의 풍요로운 체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선포는 인간이 지니는 장점을 없애지 않고 인간 변화의 다양성을 통해서 인간을 재조명하게끔 하는 동시에 무한하게 열려져 있는 가능성의 실현에로 인간을 개방시켜 준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이지만 악하게 되었고, 자기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며, 그렇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롭게 되었고 인간 고유의 자유를 선사받은 존재인 인간은 믿음을 가짐으로써, 즉 자신 자신을 잃음으로써 구원되는 존재인 것이다. 신앙의 빛은 활기에 찬 인간적 자유를 선사한다. 신앙의 증거가 없이는 구원은 단지 하나의 불가능한 가능성일 뿐이다. 신앙이 없이, “구원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 구원은 절대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하다”4). 왜냐하면 이 필요성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발췌: 이동익신부와 윤리신학 카페에서 가져 왔습니다.. |
인간 행위와 선택
2005. 4. 1. 오전 10: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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