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오직 예수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예수를 바로 그리스도로 인식하며, 또 인물과 업적의 동일성이 결정적임을 파악하는 자라면 믿음의 배타성이라든가 사랑과의 대립은커녕, 믿음과 사랑의 분립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예수와 그리스도간의 연결, 인물과 업적의 불가분성, 한 인간과 그의 헌신행위와의 동일성 - 이 모든 것은 동시에 믿음과 사랑의 연결을 뜻한다. 이제는 과연 중심을 이루게 된 예수의 자아의 특성, 그의 인격의 특성은 이 "나"가 전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아버지의 "너"에서 비롯되어 사람들의 "너희"를 위해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자아는 진리(로고스)와 사랑의 일치이기에 사랑으로 하여금 로고스, 즉 인간존재의 진리가 되게 한다. 따라서 이렇게 이해된 그리스도론이 요구하는 신앙은 조건없는 사랑의 보편적 개방성의 수호에 그 본질을 두게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알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아 바로 "사랑은 믿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가 종말심판에 대한 위대한 비유(마태 25,31-46)에서 묘사한 것과 합치된다. 심판하는 주님이 그리스도 신앙의 고백으로 요구하는 것은 내 도움을 아쉬워하는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선언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나를 아쉬워하는 사람을, 바로 여기서, 오늘 나를 대하는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의 부름을 믿음의 요구로 알아듣는 그것이다. 여기 마태오복음 25장에서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이 조건없는 인간봉사와 서로를 위한 존재로 재해석되는 듯한 것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어느 기존 교의에서의 이탈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이 해석은 기실 예수와 그리스도간의 연결, 즉 그리스도론의 핵심에서부터 나오는 귀결인 것이다. 왜냐하면 - 다시 말하지만 - 이 연결은 동시에 믿음과 사랑간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이 아닌 믿음은 참으로 그리스도적 믿음일 수 없고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가톨릭 신앙개념의 교의주의적 오해에 대응하여서도 그렇거니와, 루터의 경우와 같이 신앙만에 의한 의화의 배타성에서 오는 사랑의 세속화에 대비하여서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요셉 랏씽어)
*사랑 없이 믿음만 가진다면 바른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믿음만으로 의화된다는 개신교 신앙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꼭 알아둡시다. 선교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