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기도

2006. 6. 29. 오후 12:55:34

글자

방학 잘들 지내시죠? 다들 아시는 기도이지만 혹 도음이될까해서요.  

 

* 예수기도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위해 입술과 정신, 그리고 마음으로 고요히 침묵하며, 주님이신 예수께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형식은 “하느님의 아들,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예수기도는 초 세기에서 중세기 때 동방 그리스도 교회, 즉 그리스와 슬라브 비잔틴교회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다.

 

예수기도는 동방 그리스도교 영성 헤시카즘과 마음의 기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헤시카즘은 정신 집중, 고요 기리고 내. 외적 고독을 의미하는 헤시키아의 어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살아가는 수행이다. 헤시카즘은 침묵의 상태를 가리키는 수도 영성의 역사 안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용어이며, 수도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수도자와 은수자 또는 독수자를 나타내는 외적이며 장소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며, 일반적으로 내적인 기도를 하고 마음의 고요함을 찾고자 하는 영성과 수행이다. 마음의 기도는 예수 기도와 단계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는데, 5~13세기까지 예수 기도가 선호 되었고, 그후 13~14세기에는 아토스 성산에서 기도의 방법으로 앉는 자세, 호홉 법 등 기도를 위한 외적이며, 신체적인 자세와 기술 그리고 정신적인 내적 요인이 결합 되었다.

 

기도의 주요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구하는 짧은 기도문을 반복하여 외움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메시아라는 신앙을 고백한다. 오랜 세기동안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고, 러시아에서 ‘죄인인 저를’ 이라고 첨부하였다. 예수기도는 동방 그리스도교 영성 헤시카즘을 실천하기위한 신심의 수행방법과 함께 전승되어 왔으며, 헤시카즘은 4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 이름에 대한 열렬한 사랑(예수기도)

둘째, 죄에 대해 슬퍼하는 민감한 감성.

셋째, 잦은 반복적인 수행.

넷째, 내적 고요로 이끌어주는 잡념 없는 기도(마음의 기도).

실제적인 기도 방식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폰티스의 디아도쿠스였다.

 

예수 기도의 표준적 형태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6세기경 이집트<사부 필레몬의 생애>에서 처음 발견된다. 예수기도는 7세기 성 요한 클라마쿠스와 그 동료들에 의해 추천되었다. 그의 저서에서 기도는 단순해야 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어주는 것이라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예수기도’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예수기도의 낭송을 호홉의 리듬과 연결시키는 신체적 기술에 대한 언급은 13세기 아토스 성산의 수도자 니케포루스의 저술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턱을 가슴에 받치고, 눈은 배꼽에 집중하면서 앉아있는 기도자세를 추천한다. 다음에, 호홉 방식의 리듬은 점점 느리게 한다. 그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이 일치할 때에만, 표준적인 형식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마음을 지켜주며, 산만한 생각으로 흐르는 경향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시나이의 그레고리오는 예수기도를 그의 영성의 중심에 두면서 ‘죄인’의 개념을 첨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느님의 아들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했다. 그는 니케포루스의 신체적 기술을 추천하면서, 그 목적은 분심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 한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 기도를 하는 것은 ‘즐거운 슬픔’의 느낌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그는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성령의 현존을 깨닫게 될 때, 신성한 빛의 관상에로 이끌리며, 마음속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친다.

 

칼라브리아의 발람은 헤시카스트들의 주장과는 달리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빛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더욱이 헤시카스트들이 추천하는 신비체적인 기술들을 유물론적이며, 미신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팔라미스는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의 저술을 해석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내적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였다. 그는 창조에 스며드는 신성한 힘의 작용, 다시 말해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를 통해 하느님을 알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에너지들은 하느님과 창조 사이를 상호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실제로 창조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창조 안에, 그리고 당신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작품을 고안했던 필로칼리아의 편집자들은 영적 지도의 필요성, 영성과 교의의 연결, 그리고 고요함과 지속적인 기도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수 기도를 강조 하였다.

 

“주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저를(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 러시아의 비잔틴 수도자들은 예수기도를 묵주기도와 함께 기도한다. 예수 기도는 14세기에 와서야 널리 퍼졌다.

 

은수자 테오판은 “열정을 가지고 그분을 불러라.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을 교회에서나, 여행할 때나, 일할 때나, 책상에 앉아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한마디로 말해서, 네가 잠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다시잠자리에 들 때까지, 항상 행하여라. 이것은 태양 아래서 하나의 물체를 잡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제 자신을 영적인 세게의 태양이신 주님의 면전에 붙잡아 둘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영성서적 “순례자의 길”에서 그 순례자는 단순한 농부로써 어떻게 하면 멈추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라며 반복되는 예수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하루에 삼천 번에서 육천 번, 그리고 만 이천 번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에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셀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혀가 저절로 그 단어를 낭송하여 서두르지 않고 잠을 잘 때조차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그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갔다. 그 움직임은 그의 입술로부터 혀로 옮겨 갔다. 그때 그 기도는 혀로부터 마음(심장)으로 옮겨 갔다. 순례자는 기도가 심장의 고요함 속에서 암송되고 있음을 느꼈다.

 

결론은 기도를 자신의 심장 박동과 일치시키는 사람은 결코 기도하기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가 그의 실존의 생명 작용과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한 기도인가? 순례자는 그렇게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한 기도에 다다르는 올바른 길 위에 서 있다고 믿는다.  

댓글 6

  • 2006년 6월 29일 오후 1:35

    저~~~기..... 좋으신 말씀 같은데~~~읽다보니 앞에것을 까먹어서......

  • 2006년 6월 29일 오후 7:50

    다 잘라먹어도 주제만 알면 되는 거죠? 왠지 저도 대표님과 같은 증상이... 대표님, 우리요... 대표님은 남자가 꼭 먹어야 할 12가지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렇고, 저도 여자가 꼭 먹어야 할 12가지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먹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 2006년 6월 29일 오후 9:35

    철학시간 만큼이나 머리아파 ^^잘 지내고 계시죠?????ㅎㅎㅎ

  • 2006년 6월 29일 오후 9:52

    대표님, 총무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2006년 6월 30일 오전 12:40

    이거 무슨 시험에 나온다면 정신 차리고 읽겠지만.....집중이 안되네요...역시 시험이라야..그것도 꼭 나온다는 문제라야 좀 집중이 되니..큰 병인 것 같네요...

  • 2006년 6월 30일 오후 1:21

    아니! 어지럽다고? 신학원학생들맞나? 이정도는해야 되는거 아이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