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나눔 [루가복음 13장 10절~ 17절]
종교교육학과 1학년
회사 일이다 뭐다해서 도저히 시간과 짬을 내기가 참으로 힘든 상황에서 복음 묵상 나눔을하라는 전례 부장님 말씀에 몇일을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해야할지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 말씀은 평소 깊은 생각없이 무심코 읽어왔던 구절이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을 묵상하고 나누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고 한 회당장이 이를 불법적 행위라 단죄하는 비교적 단순한 내용이기에 여러 묵상 자료를 참고해 보기도 하고 인터넷도 검색해 보았지만 적절한 묵상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쩔수 없이 본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예수님과 회당장의 대화를 곰곰이 묵상해 보는 가운데 미진하지만 가까스로 찾은 몇가지 묵상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예수님의 행위 판단 기준과 우리의 선택 기준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3년간의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늘상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셨던 예수님께서는 밤낮이 따로 없으셨고 평일과 휴일의 구분이 없으셨던것 같습니다. 그저 인류에 대한 보편적 구원의 열정만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유일한 동인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여느때처럼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문득 병마로 고통받던 한 여인에게 시선이 머무셨고 그 여인의 지난 18년간의 고통을 한눈에 꿰뚫어 보시고는 측은한 마음에 여인을 가까이 불러 병마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장소가 회당이고, 그날이 안식일이었음과 안식일에 대한 율법 규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자리에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로부터 안식일 율법 규정 위반이 어떠한 비난과 반발을 불러 일으키리라는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김으로써 돌아올 그 당시 기득권층의 반발과 비난 보다는 한 여인을 병마로부터 구하시겠다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행위의 기준으로 선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선택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셨으리라 사려됩니다.
흔히 우리는 올바른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비난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는 언뜻 실행에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나보다 우세한 환경에 있는 이들, 또는 기득권층의 비난을 살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보수적으로 비겁한 침묵을 선택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 진리에 비추어 옳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힘있는 이들앞에서는 자신에게 미쳐질 불이익이 귀찮고 두려워 침묵하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위의 비난과 반발이 두려워 양심에는 다소 거리끼지만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합리화하는 모습들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속에는 더불어 일관성이 결여된 판단의 이중 잣대가 병존하는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 9장 18절에 등장하는 회당장은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같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죽은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복음의 회당장 자신의 딸이 죽었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그 딸을 살리시는데 율법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분노하며 단죄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이중적 태도에 대해 위선적인 처사라 질책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저 역시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이 회당장을 예수님과 같은 방향에서 손가락질하며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묵상을 하다 보니 회당장의 모습은 결코 그만의 모습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은 모든 판단과 행위의 저변에 진리와 사랑의 정신이 깔려 있는 데 반하여 제 판단의 저변에는 때때로 회당장과 같은 관습과 고정관념, 그리고 경험칙에 근거한 고집과 편견 같은 테두리에 둘러쌓여 아전인수격의 이중적 잣대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당장의 모습에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추구하여야 할 핵심은 율법의 형식적 추구를 넘어선 법정신 추구라는 대당명제임을 다시 한번 몸소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요한 1서 1장의 “자기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라는 말씀을 묵상하여 봅니다.
오늘 복음의 회당장처럼 삶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우리 역시 빛 속에 사는 자라 내심 확신하면서 예수님과 같은 선한 사랑의 의지는 메마른채, 자신의 무미건조한 원칙과 교만과 아집에서 발로하는 주관적 판단 기준으로 주위 형제 자매들을 판단하고 단죄하였던 적은 없는지.. 그리하여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같은 위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미사 중에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