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공개적으로 내놓은 요구 조건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포기이다. 여기에는 북한 체제(또는 정권) 보장과 경제제재조치 해제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적대시 정책’이나 ‘체제 보장’ 같은 개념이 대단히 포괄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북한에 대해 ‘악의 축’이니 ‘폭정의 전초기지’라며 말로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경제제재와 북한인권법 제정, 그리고 주한미군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한 적대 정책으로 여겨질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려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휴전협정을 미·북 간 평화협정으로 바꾸며,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대북 경제지원을 제공하고 대북 수교도 이루어야 한다.
북한은 이런 요구 목록을 절대 한꺼번에 내놓지 않는다. 회담에 참가하는 데서부터 조건을 내건 뒤 회담에서 요구 사항을 잘게 썰어가며 조금씩 단계를 올려가는 이른바 ‘살라미 전술’을 구사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문은 미국이 만약 북한과 관계개선을 이루면 김정일이 과연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 경우 북한은 핵무기와 함께 자신의 대미(對美) 적대 정책도 포기해야 한다. 미국만 대북 적대 정책을 포기하고 북한은 계속 미국을 ‘철천지 원쑤’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정권이 미국을 적으로 삼지 않게 되는 것은 그 어떤 개혁조치보다도 어렵고 체제에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미제(美帝)’에 대한 증오와 비타협적 투쟁은 북한정권의 존립 근거이다. 북한체제의 최고규범인 노동당 규약은 전문(前文)에서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 침략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통치를 청산하며…”라고 규정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만 미국과 화해하고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주민들의 대미 적개심을 고취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폭압통치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김정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획기적이고 대폭적인 관계개선을 통해 한반도에서 확실한 대남(對南)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 덕분에 자신의 정권 안정도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 한 쉽게 핵무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6자회담을 거부하고 미·북 양자 협상을 고집하는 본뜻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정치·군사적으로 한반도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한국과 미국이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김정일로서는 핵무기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국제적 압력을 자초할 게 뻔한 핵무기 보유를 고집하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핵무기를 개발·보유했다가 포기한 대표적 국가는 남아공이다. 남아공이 핵무기를 폐기한 것은 스스로 국내의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함으로써 국제적 압력이 사라지게 만든 때문이었다. 북한 핵의 운명도 궁극적으로는 북한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어떤 체제로 변해나가느냐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북핵 해결의 길은 그래서 여전히 멀고도 험난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