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기도 묵상

2005. 4. 7. 오전 10:10:29

글자
2005년 4월 7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

 

제1독서 사도행전 5,27-33
그 무렵 경비원들이 사도들을 의회에 데려다 세워 놓자 대사제가 이렇게 심문하였다. “예수의 이름으로는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는데도 당신들은 어쩌자고 온 예루살렘에다 당신네 교를 퍼뜨리는 거요?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셔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 증인이십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하였다.

 

 

베드로는 스스로 맹세한 것을 재판정에서 명백히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나자렛 예수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베드로의 하느님은 조상들의 하느님이며, 최고 의회 의원들의 하느님이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입니다.



복음 요한 3,31-36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님 자신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면 생명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인간은 생명과 죽음, 하느님께 속함과 하느님을 거부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도 미래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입니다.





◆가끔 신부님들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제 직무 가운데 강론과 고해성사만 없으면 사제생활도 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고해성사는 그저 듣기만 하면 되지만 강론은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신자들이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 주일에 한 번쯤이라면 열심히 준비해 강론하겠지만 매일매일 묵상하고 강론을 준비해 강론대에 서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몇 년쯤 하다 보면 똑같은 복음 말씀을 가지고 강론을 해야 하는데 밑천 다 떨어지고 나면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가끔은 강론을 준비하지 못하고 강론대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성령께 기도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강론 준비 못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저의 입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강론을 하면 신기하게도 강론을 준비하고 했을 때보다도 훨씬 깊이있는 강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늘 준비 없이 성령께만 의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정신차리고 시간을 내어 준비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차적인 일에 매달려 본업인 예언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준비 없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주님, 오늘 제 강론을 통하여 저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 듣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게 하시어 부활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아멘.

정민수 신부(서울대교구 중견사제연수)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 돌판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富)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을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이 시를 보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서 살았던 내 자신의 모습들... 그러면서도 때로는 주님께 갖은 원망을 던졌던 불충함들이 떠올려졌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는 그 말씀이 더 크게 와 닿습니다.

“그런즉, 너희들을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결국 내가 지금까지 행했던 행동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잘못된 판단에 의해 단죄하였던 나의 이웃에 대한 모든 행동들 하나하나가 주님을 탓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우리 모두는 비록 세상에서 나온 사람이지만,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을 했으면 세상일을 말하고 그 일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하늘의 일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모든 것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세상일이 아닌 하느님 일에 더 깊은 관심을 두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주님께 큰 사랑을 드리는 그분의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보다 하느님의 진리가 더 소중함을 온몸으로 증거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남의 탓을 외치지 맙시다.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


모든 사람들이 좋은 꿈과 멋진 인생을 꿈구었지만
"내일" 또는 "다음에" 라는 말에 속아 인생을 그저
그런 삶으로 허비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오늘"내가 돕지 못하고 하지 못한 일은
"내일"에도 할 수 없습니다.
"다음" 이라는 기회에 속지 마십시오.
"다음"이 오지 않은 채 우리의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좋은 일을 지금부터
작게라도 시작하십시오.
일을 미루다보면 게으름의 군살이 성장보다는 퇴보가,
맑은 정신보다는 혼탁함이, 기쁨보다는 한숨이 더 빨리 찾아옵니다.

미루던 일을 시작하고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감과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부터 아주 작은 실천을 해보는것 그것이 기쁨이되어
인생의 역전의 홈런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죽을때 까지 하신다는

5단계개강 첫날에 선생님이 말씀하셨지요?

기도 하면서 사랑의 봉사가 무엇인지 우리 살펴 봅시다.        아멘!

댓글 1

  • 2005년 4월 7일 오후 4:00

    인생에 연습은 없다는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최선다하기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