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의 은빛 물결과 삶의 소리
강 훈 정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가을빛이 눈부시다
올여름 매몰차게 쏟아 붓던 폭우로 범람했던 당시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풍경처럼 남아 있고 부러진 나뭇가지에
서 상처를 입은 바람은 홧홧해진 몸을 식히느라 혼줄이 났을테다
또 한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이다
가을이 오면 억새가 피는 것인지 억새가 피면 가을이 오는 것인지 한가롭기 그지없는 강 들녁에는 억새가 어우
러져있었다 나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꽃도 아닌 것이
억새도 꽃이다?
억새꽃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었던가?
코를 가만히 대어보면 꽃향기보다는 풀냄새가 진하다
어쩌면 꽃향기는 없다 할 수 있겠다
옛 사람들은 꽃향기는 맡는 것이 아니라 '문향 (聞香) 이라 하여 꽃향기는 듣는 것이라고 했다 하니 이 얼마나
멋들어진 미학적 표현인지 놀랍다
억새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하는 노래에서 '으악새' 가 억새라고 한다
억새가 슬피우니 억새의 향기는 맡는다기보다는 듣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물기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작은 들풀들이야말로 밤새 물방울로 빚은 물의 꽃이 아닐른지!
죽은 듯이 살다가 싹을 틔우는 섭리, 삶의 소리에 귀를 적셔본다
억새밭에 서면 멈추지 않는 바람에 서로 외로운 몸들을 비벼대며 행복에 겨워 바스락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흐르는 생명의 소리 작은 것으로도 충분히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 고마운 일이다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황금빛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성숙의 연륜대로 익어가는 풍경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억새는 그 생김새가 단순하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마음을 빼앗는 매력이 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또 머무르겠지
희망과 미련 같은 것 이곳 억새 숲 어딘가에 남겨두고 떠나지 않겠나!
순애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201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