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3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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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울피아(Ulphia)
도미시오(Domitius)
축일 10월 23일
성녀 울피아(Ulphia)는 연로한 은수자인
성 도미티우스(또는 도미시오)의 지도하에
은수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두 분의
성인 성녀는 생아쉘(Saint-Acheul) 지방에서
성모 성당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성 도미티우스가 일찍 일어나서 그녀의 움막 문을
지팡이로 두드리면 기도 시간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개구리가 너무나 울어대서 울피아가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성인의 지팡이 소리도
못들은 채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성인에게 요청하여 지팡이로 문을
두드리지 말도록 하고, 자신이 스스로
기도시간을 정확히 지켰다고 한다.
그녀는 프랑스 아미앵의 수호성인처럼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도미티우스는 신부이거나 부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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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마노(Romanus)
축일 10월 23일
성 로마누스(또는 로마노)는 프랑크인으로서
클로테르 2세의 궁에서 살았다.
630년 히울프의 서거 후 그가 루앙의 주교로
선임되었는데, 그 지방의 수많은 우상들이
그의 신심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불신자들을 개종시키고,
그 도시의 상징이던 비너스 신전을 파괴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센(Seine) 강변에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손에 움켜쥐고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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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
축일 10월 23일
바르톨로메우스
(Bartholomaeus, 또는 바르톨로메오)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의 브레간자에서
태어나 파도바(Padova)에서 공부하던 중에
설립자로부터 직접 도미니코회 수도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키프로스(Cyprus)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팔레스티나(Palestina)에서
프랑스의 성 루도비쿠스(Ludovicus)를 만나
위대한 성왕과의 우정을 맺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교황특사로 활약하였고, 나중에는
비첸차(Vicenza)의 주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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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Benedict)
축일 10월 23일
세바스테(Sebaste, 기원전 30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사마리아를 하사받은
헤로데 대왕은 이를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 발음인 세바스테로
명명하였다)의 주교로 추정되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또는 베네딕토)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 지방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푸아티에(Poitiers) 근교에 은둔처를 세웠는데,
그곳은 후에 베네딕토 규범을 따르는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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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로(Verus)
축일 10월 23일
성 베루스(또는 베로)는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 살레르노의
제3대 주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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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베리노(Severinus)
축일 10월 23일
로마 순교록에는 ‘쾰른(Koln)의 주교’
성 세베리누스(또는 세베리노)가 보르도에서
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철저히 분쇄코자
노력했던 분으로 기억된다. 그가
사제로 있을 때 어느 들판을 지나다가
“세베리누스야, 너는 쾰른의 주교가 될 것이다.”
“언제,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너의 지팡이에 잎이 돋고 꽃이 필 때”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가
뿌리를 내리고 잎이 무성하더니 이내 꽃을
피울 때 그는 쾰른으로 불려갔다.
그는 쾰른에서 아리우스 이단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뒤에 보르도에 와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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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베리노 보에시우스(Severinus Boethius)
축일 10월 23일
로마(Rome)에서도 유명한 아니치아 가문의
후손인 성 아니치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Torquatus Severinus Boethius, 또는
세베리노 보에시우스)는 487년에 집정관을 지낸
플라비우스 만리우스 보에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기 때에 고아가 되어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Aurelius Symmachus)에
의하여 자랐다.
젊어서부터 그는 학식이 뛰어나 주위의 칭송을
받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었고,
또 피타고라스, 프톨레미, 니코마쿠스,
에우클리드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
또한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천문학, 음악, 논리학과 신학에서도
대가였고, 몇 편의 신학 논문도 발표했는데
그중의 하나인 “삼위일체에 대하여”는
매우 유명하다.
510년에 그는 오스트로고트의 황제 테오데리히
의하여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황제의 모든 명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천문학을 불경건한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고위층의 의견을 무시했기
때문에 파비아(Pavia)에서 투옥되기도 하였다.
9개월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을 저술하였다. 그 후 그는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최초의 스콜라 학자로 간주되며,
따라서 중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작인 철학의 위안은 놀라울 정도로
보편화되었으며,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서 번역은
불세출의 작품이 되었다. 그는 188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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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루치오(Allucio)
축일 10월 23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페쉬아의 수호성인인 성 알루치오는
양치기였다. 그러나 그 지방의
발 디 니에볼레 구호소에 관심을 갖고
협력하던 중에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그 구호소의 제2의 설립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산을 다니면서 산길과 여울을 따라
쉴 곳을 마련하는 등 이와 유사한 사회활동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성 알루치오 수사’라는 칭호가 주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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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텔플레다(Ethelfleda)
축일 10월 23일
성 둔스타누스(Dunstanus, 5월 19일)의
높은 존경을 받았던 성녀 에텔플레다는
앵글로색슨의 공주였다. 그녀는 수도원의
규율 하에 영국 잉글랜드의 글래스턴베리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성녀 에텔플레다는
엘프레다(Elfreda) 또는 엘플레다(Elfleda)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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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녀 요세피나 르루(Josephine Leroux)
축일 10월 23일
프랑스의 캉브레(Cambrai)에서 신심 깊은 부모에게
태어난 요세피나 르루(Josephina Leroux)는 성장하여
발랑시엔(Valenciennes)에 있는 우르술라 수녀회의
수녀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수녀원에서
추방된 그녀는 잠시 벨기에 에노(Hainault) 지방의
몽스(Mons)로 피신하였다가 1793년에 다시
발랑시엔으로 돌아왔다.
1794년 그녀와 다른 10명의 수녀들이 혁명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한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해 10월 17일 다섯 명의 수녀들이 단두대에서
순교하였고, 요세피나 르루와 다른 5명의 수녀들 역시
23일 단두대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그녀와 함께 순교한 동료 수녀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요세피나 르루는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
(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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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10월 23일
성 요한(Joannes)은 이탈리아 아브루치(Abruzzi)
지방의 카피스트라노에서 1386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전투에서 사망한 후
요한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다가 1406년 페루자(Perugia)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412년에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에 의해
페루자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416년 페루자와 말라테스타
(Malatesta)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평화를
제안하는 사절로 말라테스타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당시 요한은 전쟁 직전에 산 발렌티노 백작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으나 혼인이 완결된 상태는
아니었다. 브루파(Brufa) 감옥에 갇힌 그는
진지하게 영혼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 수도자가 되고자
혼인에 대한 관면을 받고 1415년 10월 4일
페루자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오누프리우스 데 세자노(Onuphrius de Seggiano)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서원을 하고 시에나(Siena)의 베르나르디누스
(Bernardinus)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142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즉시 설교자로 나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이들이 개종하였고 또 수도생활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게 하였다.
또한 그는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누스와 함께
프란치스코회의 개혁을 위하여도 큰 활동을
하였고, 그들의 노력으로 여러 지파로
나눠져 있던 프란치스코회가 잠시나마 일치를
누리기도 했다(1430년). 요한은 1435-1436년에
교황특사로 활동했으며, 1436년 12월에는
그의 노력으로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437년에는 페라라(Ferrara)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개혁을 도왔다. 1439년 말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1440-1442년까지 밀라노(Milano)에서
설교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442년 말과 1443년에는 부르고뉴(Bourgogne)와
플랑드르(Flandre)를 방문하여 필리프 3세가
대립교황인 펠릭스 5세와 동맹을 맺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바이에른(Bayern), 작센(Sachsen) 그리고
폴란드를 두루 다니며 설교하여 신앙을 크게
부흥시켰고, 이단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은 터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끝났다. 그는
이것으로 선교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십자군들에게
설교하러 다녔다. 그는 1456년 9월 1일
일록(Ilok)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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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낙관적인 사람들로 전해진다.
악의 현존과 그 결과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에 맡긴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의 힘은 죄인들에게뿐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까지 확대된다.
14세기에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인구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40퍼센트가 흑색 죽음에 휩쓸려 갔다.
동시에 서방의 대분열은 교황이라고 자칭하는
두세 명이 교회를 갈라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중이었으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도 계속 싸우고 있었다.
당시의 문화와 시대 정신이 암흑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요한은 아퀼라 지방의
카페스트라노에서 1386년에 태어났다.
그는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재능과 성공
또한 대단했다. 그는 26세에 페루자의 총독이 되었다.
말라테스타스와의 전투 후에 감옥에 갇힌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심했다.
결국 30세가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회 수련자로
들어간 그는 4년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설교는 종교적인 무관심과 혼란의 시기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끌어들였다.
그와 12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중부 유럽국가들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처럼 영접되었다.
그들은 죽어 가는 신앙과 신심을 되살리는 데
도구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자체가 성프란치스코의
규칙에 대한 해석과 실천을 놓고 혼란에 빠졌다.
요한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의 전문적 법률 지식을
통하여 이단적인 '프라티첼리(Fraticelli)'는 사라지고
'신성함(Spiritualis)'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희랍 교회 및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애썼으나 불행히도 사소한 진전밖에는 이루지 못했다.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그는 유럽을 방어하기 위한 십자군 모집을 설교할
사명을 받았다.
바이에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약간의 호응을 얻은
그는 헝가리에서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하고 자신도 벨그라드에 군대를 이끌고 갔다.
요한 유냐디 대장의 지휘하에 그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벨그라드의 포위를 풀었다.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은 마음과 몸이 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부산물로 생겨난 전염병에
쉽사리 희생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456년 10월 23일이었다.
설명 ; 요한의 전기 작가인 요한 호퍼는
이 성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뤼셀회를 상기시키는데
그 회는 완전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조직의 표어는 자율적으로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세 가지 말로 되어 있다.
이말은 요한의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는 잠시라도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깊은 그리스도교적 낙관주의는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생겨난 신뢰로 온갖 것,
전쟁 문제까지 다루었던 것이다.
인용 ; 빌라흐의 헝가리 도시에 있는
성인의 무덤에는 총독이 이런 메시지를 새기게 했다.
"이곳은 카페스트라노 출신으로, 온갖 찬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 요한의 무덤이다.
그는 신앙의 선구자이며 옹호자이고 교회의 파수꾼이며,
자기 수도회의 열성적인 보호자이다.
또한 그는 온세계의 장식이며 진리와 정의의 애호가이고
생활의 모범으로 가장 확실한 교리의 인도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말로 찬양받을 그분은 천상에서
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실제적이고 성공적인 낙관주의자에게
적합한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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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부오니(John Buoni)
축일 10월 23일
요한 부오니(Joannes Buoni)는 부모를 잃은 뒤에
이탈리아 만투아(Mantua)의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다니며 정처 없이 살다가
40세 때에 중병을 앓고 난 다음부터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주 성당을 찾다가 만투아
주교의 안배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독한 생활 속에서 자신을 극복하는데
성공하여 높은 성덕을 쌓았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수많은 제자들이 주위에 몰려들므로
요한은 공동체를 세우고 교황의 승인을 구하였다.
교황은 그에게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규칙을 내려주었다.
요한은 초자연적 은혜를 많이 받았고
또 수없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가벼운 옷으로만 지냈고 잠자리도 극히 불량하였다.
그의 수도회는 보니티로 알려졌는데,
보니티회는 그가 생존할 당시에 이미 11개의
수도원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1256년 교황의
명에 의하여 다른 수도회와 합하고,
수도회의 이름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수자회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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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냐시오(Ignatius)
축일 10월 23일
성 이냐시오는 비잔틴 황제 미카엘 1세와
니케포루스 황제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들의 부친이 아르메니아(Armenia)의
레오(Leo)에 의하여 폐위됨으로써 그들도
어느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후일 이냐시오는
수도자가 되었고, 사제로 서품되어 자기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846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857년 황제 미카엘 3세의 조카인
바르다스(Bardas)의 근친상간을 묵인하라는
요청을 거부한 이유로 파면되어 테레빈토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바르다스는 그의
비서인 포티우스(Potius)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으나, 정권이 바뀜에 따라 이냐시오의
권리가 회복되었다. 이때 그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II)에게 공의회
개최를 요구하여
(제8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867-870년)
포티우스와 그 지지자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화를 지켰다. 그 후 그는 불가리아에 대한
관할권 문제로 로마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
파문의 위협을 받던 중에 선종하였다.
비록 그는 매우 뛰어난 성인이었지만 그 당시의
정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많은
난관을 겪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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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르마노(Germanus)
성 세르반두스(Servandus)
축일 10월 23일
북아프리카 탕헤르(Tangier)에서 순교한
성 마루첼루스(Marcellus, 10월 30일)의 아들로
전해지는 성 세르반두스(Servandus)와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체포되어
탕헤르로 가던 중 에스파냐의 카디즈(Cadiz)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남부 에스파냐 전역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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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도로(Theodore)
축일 10월 23일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의
삼촌인 율리아누스 역시 배교자였는데,
그가 안티오키아의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곳의 성당에 금과 은이 많이 숨겨져 있다는
풍문만 믿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명을 내렸다.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
신부는 집정관이 보낸 군인들에게 거룩한
성상들과 제구들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박해자 율리아누스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자랑했다가 혼쭐이 났으며
악질 병에 걸려 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성 테오도루스는 테오도레트(Theodoret)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