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10월19일)

2014. 10. 18. 오전 7:07:04

글자

♡10월 19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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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또는 가롤로)

축일 10월 19일 

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또는 가롤로)는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 후에 인디안 사목을 위하여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
1649년 그가 정착해 있던 휴런족(Huron) 인디언 마을이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자,
그는 그들을 도망가도록 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다가 전투용
도끼를 맞고 절명하였다.
가르니에 신부의 장상은 그를 이렇게 말하였다.
“웃으면서 선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르니에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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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브리엘 랄르망(Gabriel Lalemant)
 
축일  10월 19일 

성 가브리엘 랄르망은 1630년에 예수회원이 되어
외국 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건강은 늘 좋지
못하였다. 2년 동안 캐나다 퀘벡에서 사목한 후
그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와
합류하여 인디언 휴런족(Huron) 선교에 나섰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할 즈음에 이로쿼이족
(Iroquois)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사제가 포로가
되어 생 이나스까지 호송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몸서리치는 고문을 받았는데
브레뵈프 신부는 몇 시간 내에 운명하였으나,
아주 묘하게도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는
그날 밤은 넘겼지만 결국은 살해되고 말았다.
랄르망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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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노엘 샤바넬(Noel Chabanel)
 
축일  10월 19일 

프랑스의 망드 근교에서 출생한 성 노엘 샤바넬
(또는 나탈리스 샤바넬, Natalis Chabanel)은
1630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1643년에
캐나다 뉴 프랑스의 휴론(Huron) 인디언들의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에타리타의 인디언
마을에서 성 카롤루스 가르니엘(Carolus Garnier)
신부의 보좌로 활동하다가, 이웃 마을인
생트 마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배교자 인디언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노엘 샤바넬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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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축일  10월 19일 

프랑스의 앙주(Anjou)에서 태어난
성 르네 구필은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그는 완쾌되어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른 예수회의 선교사와 합류하였다.
그는 휴런족(Huron) 인디언 선교단의 평신도
보조자가 되어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1642년에 성 이사악 조그와 함께 여행하던
중에 이로쿼이족(Iroquois) 인디언들의
포로가 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르네 구필은 레나투스 구필
(Renatus Goupil, 또는 레나토 구필)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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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 다니엘(Anthony Daniel)
 
축일  10월 19일 

프랑스 디프 태생인 성 안토니우스 다니엘
(Antonius Daniel, 또는 안토니오)은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곧 이를 포기하고
1621년 루앙(Rouen)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4년 동안 가르치면서 동시에
신학을 공부하여 163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잠시 외(Yeu)의 대학교에 봉직하다가
다른 세 명의 사제와 함께 케이프 브리턴 섬과
아르카디아, 뉴프랑스(New France, 캐나다)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년 후에 그는
다시 퀘벡으로 갔다.

그는 휴런족(Huron) 인디언들과의 선교활동이
대성공을 거두자, 인디언 아동들을 위한
학교를 퀘벡에 세웠다. 그러나 휴런족과
늘 적대관계에 있던 이로쿼이족(Iroquois)들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때는 1648년 7월 4일이었고,
온타리오주(Ontario) 힐스데일 근교의
테노스테이의 인디언 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다니엘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동료 예수회원
7명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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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드 라 랑드(John de La Lande) 

축일  10월 19일 

프랑스 디에프(Dieppe) 출신인 성 요한(Joannes)은
일찍이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가 그곳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신도 보조자가 되었다.
1646년 그는 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를
수행하여 이로쿼이(Iroquois) 인디언 지역을
여행하다가 모호크족(Mohawk)들에게 체포되어
뉴욕(New York)주의 알바니 교외 오세르네논에서
참수치명 당하였다. 요한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동료 예수회원 7명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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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드 브레뵈프(John de Brebeuf)
 
축일  10월 19일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콩데(Conde)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Joannes)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길 원하였다. 그러나
사제직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몸이 약하였다. 하지만 그는 1617년에
루앙(Rouen)의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 퀘벡 주로
떠났으며, 주로 인디언 휴런족(Huron)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캐나다로 온 이후 그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34년 동안이나 전교활동을 개척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벡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 때 그도 쫓겨나서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63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선교사들이 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요한은 그 와중에도 인디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가 잠시 퀘벡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와 가장 적대적이던 이로쿼이
(Iroquois) 인디언들로부터 체포당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약 7천 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휴런족을 위해
프랑스어-휴런어 사전과 그들의 언어로 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요한과 더불어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1930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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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
 
축일  10월 19일 

성 이사악 조그는 1624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2년 뒤에 캐나다로 가는
선교사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모호크족
(Mohawk)들에게 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슈피리어호(Lake Superior)의 동쪽
통로를 관통하고 개척한 최초의 유럽 사람이다.
1642년 그는 이로쿼이(Iroquois) 인디언에게
체포되어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처참하게 손이 잘리는 등의 고문을 받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어느 네덜란드 사람의 도움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3년이 채 못 되어 그는 다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칼로 난자당한 끝에
마지막으로 도끼로 쳐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인디언들에
의해 희생된 다른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이사쿠스 조그
(Isaacus Jogues, 또는 이사코 조그)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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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치오(Lucius)

성 프톨레메오(Ptolemaeus)
 
축일  10월 19일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순교자 당시에
어느 부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남편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예비자 모임에
인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나태하여 그 모임에 나가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남편과 헤어졌다.
이에 앙심을 품은 남편이 그녀를 고발하였지만
무혐의로 풀려나자, 그 대신에 자기에게
교리를 가르친 성 프톨레메우스(Ptolemaeus)를
고발하여 체포되었다. 그가 재판을 받는 자리에
함께 있던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라는
사람은 재판관에게 항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죄를 범한 일이 없는데 왜
사형선고를 내리는지요?” 이때 재판장은
그 역시 그리스도인인줄 알고 함께 처형하여
이들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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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로(Varus)
 
축일  10월 19일

로마의 순교록에는 이집트의
성 바루스(또는 바로)의 고난 이야기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황제 막시미누스
치하의 군인이던 바루스는 거룩한 일곱 명의
수도자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들을
찾아가서 먹을 것을 넣어주곤 하였는데,
그분들 중에서 한 분이 운명하자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 후 혹심한
고문이 시작되어 나머지 수도자들과 함께
거룩하게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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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십자가의)(Paul of the Cross)
 
축일  10월 19일

이탈리아의 오바다(Ovada) 태생인
성 바오로 프란치스코 다네이
(Paolo Francesco Danei)는 몰락한 어느
귀족의 맏이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카스텔라초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싸우는 베네치아(Venezia) 공국의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결혼도 마다하면서 몇 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문장을 검은 옷에 단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설립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설립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Paulus)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티스타와 함께 로마(Rome)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하였다.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으나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들은 몬테 아르젠타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었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
(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그는
예수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여자 수도회 수녀들이
코르네토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는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다가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운명하였고,
1867년 비오 9세(Pius IX)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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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가라비토(Petrus Garavito) 

축일  10월 19일

에스파냐 에스트레마두라의 알칸타라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가라비토
(Petrus Garavito)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6세 때에
만하레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시하던 중에
바다호스로 파견되었고, 152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을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 플라센시아,
라파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의 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한때
그는 궁중의 전속사제로 일하다가,
1538년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고, 이것을 관구총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자 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스본(Lisbon) 교외
아라비다 산에서 성 마리아의 마르테노 형제와
함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였다. 관구 내에서는 자신의 규칙이
통과되지 못하자, 이번에는 코리아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콘벤투알의 지도하에 있는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교황 율리우스 3세
(Julius III)로부터 받았는데, 이것이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1561년에는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는데,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콘벤투알에서 프란치스코회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Teresa of Avila)를 만나서 그의 고해신부 겸
상담자가 되었으며, 카르멜 개혁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는 “기도와 묵상론”을 썼는데, 이것이 후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669년에 시성되었고, 1862년부터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그는 위대한 신비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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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라노(Veranus)
 
축일  10월 19일 

프랑스의 보클뤼즈(Vaucluse)에서 태어난
성 베라누스(또는 베라노)는 카바이용의
주교로서 자선사업 개발의 지도자로서
또 지역 수도원의 후원자로서 봉사하였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11월 17일)는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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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로니코(Beronicus)

성녀 펠라기아(Pelagia)
 
축일  10월 19일

성 베로니쿠스(또는 베로니코)와
성녀 펠라기아(Pelagia)를 비롯한
총 51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중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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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퀼리노(Aquilinus)
 
축일  10월 19일 

성 아퀼리누스(또는 아퀼리노)는 프랑스의
바이외(Bayeux)에서 태어나 궁중에서 지냈다.
그는 클로비스 2세의 전투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아내인 샤르트르를 만났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며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데 여생을 바치기로
서로 약속했다. 이 당시 성 아퀼리누스는
40세였다. 그들은 에브뢰로 가서 10여 년 동안
조용히 살았는데, 성 에테르누스의 서거로
말미암아 성 아퀼리누스가 그 주교직을
계승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는 비록 원하지 않았으나 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주교로 착좌하였으나, 주교보다는
은수자 생활이 더 알맞다고 느꼈으므로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주교좌
옆에 움막을 짓고서 많은 시간을 보속과 고행
그리고 기도 중에서 하루의 삶을 살았다.
만년에 그는 시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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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스테리오(Eusterius)
 
축일  10월 19일

성 에우스테리우스(또는 에우스테리오)는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
살레르노의 제4대 주교였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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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트비노(Ethbin) 

축일  10월 19일 

성 에트비누스(Ethbinus, 또는 에트비노)는
15세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성 삼손(Sampson)의 지도를 받고 성장하도록
배려하였다. 후일 그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Bretagne)에서 성 빈발로에(Winwaloe)의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열심히
생활하였다.

어느 날 그의 스승과 함께 길을 가는 도중에
길가에 버려진 가련한 나환자 한 사람을 보았다.
“이 불쌍한 벗을 위해 할 만한 일은 없겠는가?”
하고 스승이 물었다. 이때 에트비누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했던 대로 하겠습니다.
그를 일으켜 함께 걷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스승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굳은 믿음과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신뢰심을
엿보고 만족해하였다. 그는 마침내 그 나환자를
치유하였다고 한다.

에트비누스의 수도원이 프랑크족들에 의해
파괴되자 그는 아일랜드로 피신하여 그곳의
킬데어 부근 숲속에서 거의 20년 동안 살다가
운명하였다. 그의 덕행과 기적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로마 전례력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만 아일랜드 교회력에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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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10월 19일

성 요한(Joannes)은 초창기의 불가리아
수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60여 년 동안이나
릴라 산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릴라 대수도원을 세웠는데, 1947년에
공산 정부에 의하여 역으로 개조될 때까지
수세기를 이어온 유명한 수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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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축일  10월 19일 

막시미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 때 순교한
성 바루스(Varus, 10월 19일)의 유해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어느 신자 과부에 의하여
털로 만든 가마니에 숨겨서 아드라하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성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으므로
그들은 순교자의 무덤을 중심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녀의 아들
요한(Joannes)이 군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성 바루스를 공경하는 대성당을 짓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성당을 완공한 날에 그 아들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어버렸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부림치다가 하느님께
당신의 외아들을 살려주십사고 늘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꿈에 성 바루스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내게
보여 준 사랑을 내가 잊은 듯싶은가? 내가
그대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은 듯 보이는가? 보라. 이제 그 응답이 왔다.
그는 이제 기력을 되찾았다.” 성녀는
“이제 만족합니다. 그러나 나도 이제 성인과
내 아들과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자,
“안 된다. 나는 네 아들과 함께 있어야 하니
좀 더 기다리면 우리가 영접할 것이다." 하고
성인이 대답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성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순교자에 대한 사랑으로 여생을
살다가 운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성 바루스와 아들 요한 곁의 대성당에
안장하여 공경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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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Thomas)
 
축일  10월 19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의
비비유 지방 태생인 토마스 엘리에
(Thomas Helye)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지극했고 성장해서는 고향 마을의 교사 및
교리 선생이 되었다. 그의 교수법이나 강의
내용이 좋아서 이웃 마을 셰르부르(Cherbourg)
주민들의 초청으로 그곳 아이들도 가르쳤으나
병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병에서 회복된 그는 로마(Rome)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한 후 사제가 되었는데 그에게는 설교의
특은이 내렸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마치
선교사인양 설교하는 일에 전념했고,
병자와 죄인들을 방문했으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인근의 아브랑슈, 바이외(Bayeux) 그리고
리지외(Lisieux) 등 수많은 지역을 무리하게
다닌 결과 중병을 얻어 결국 망슈(Manche)의
보빌(Vauville) 성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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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프레데스빈다(Fredeswinda)
 
축일  10월 19일 

프리데스위다(Frideswide)로도 불리는
성녀 프레데스빈다는 영국 옥스퍼드 시와
대학교의 수호성녀이지만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공주였으나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왕궁을 뛰쳐나왔고,
3년 동안 평복을 입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결국 청혼자가 그녀와의 청혼을 포기하게 되자
성녀 프레데스빈다는 옥스퍼드에 베네딕토회
수녀원을 짓고 여생을 기도와 고행 속에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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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필립보 하워드(Philip Howard)
 
축일  10월 19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 동부 노퍽(Norfolk)의
네 번째 공작인 토마스 하워드(Thomas Howard)는
1572년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에 의하여
참수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
성 필리푸스 하워드(Philippus Howard, 또는
필립보 하워드)는 노퍽의 공작 지위를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는 12세 때에 데크르(Dacre) 경의
딸 앤(Anne)과 결혼하였다. 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전으로 갔을 때, 그는 더 이상
당할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여왕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아내를 무시하고 또 여왕의 환심을 사려고도
노력하였으나, 런던탑의 끔찍한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아내와 결합하고 또 예수회원인
윌리엄 웨스턴 신부의 도움으로 교회와 화해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재차 투옥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을 플랑드르(Flandre) 지방으로
피신시키고 여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필리푸스 하워드는 결국 38세의 일기로 순교했는데,
10여 년 이상을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개종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위였고,
틈만 나면 신심서적들을 저술하거나 번역하여
영국내의 가톨릭 운동에 기여했다. 그는
일주일에 3일씩 단식함으로써 건강이 좋지
못하였으며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기도를 바친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교황 바오로 6세
(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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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리차드 엑슬리 (R. Yaxley)  
 
축일 : 10월 19일

잉글랜드 린컨셔의 보스톤 태생인 그는
라임스에서 사제수업을 받고 1585년에
서품되었다. 1586년, 그는 잉글랜드
선교단의 일원으로 입국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옥스포드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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