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 주교좌성당

이정은

2013. 8. 26. 오후 7:45:40

 

 

 

 

 

 

 

 

 

 

 

 

 

 

 

 

 

 

 

 

 

 

 

 

 

 

 

 

 

 

 

 

 

 

 

          * 사적 제290호의 경상도 지역 최초의 본당 *

 

 경상도 지역 최초의 성당이며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93년 당시 남산동으로 불리던 현재의 계산동에 설립되었다.

경상도 지역 성당이 설립된 것은 개항 직후의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였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의 칠곡 신나무골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7년에 로베르 신부는 전해에 맞이한 보두네(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보좌 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장차 대구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새방골[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상리동]의

대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 성당’이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 계산동 성당의 전신이다.
1897년 현재의 계산동 성당의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축성식은 같은 해 성탄 첨례 날에 거행하였다.

당시 성당 대지를 물색 중 처음에는 동산(東山)의 구릉지를 내정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대구에서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더욱이 어렵게 지은 한국식 목조 십자형은 완공한 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 계획을 세워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 혹은 홍콩에서 수입하여 서양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뒤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으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되고 교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성당 종각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뒤쪽을 확장하여 남북으로 나래를 달아

1918년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훗날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 계산동 성당 *


사적 제290호.

1918년의 증축으로 완성을 본 이 건물은 도심의 평지에 건축된 연건평 3백 평 규모의 벽돌조 건물로,

전주 전동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1899년 건축된 목조십자형 기와집 성당이 1900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로베르(金保祿) 신부가 설계하고

프랑스·중국 등지에서 건축 기술자와 도목수·석공 등 30여 명을 초빙, 2년 여 만에 완공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 삼랑식(三廊式)으로 신자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입면은 서쪽 정면에 종탑(鐘塔) 기능의 2개의 8각형 첨탑을 세워 건축물의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문은 부벽(扶壁) 구조에 아치로 설계하였으며,

정면 현관과 측랑(側廊) 위쪽에 있는 꽃무늬 창은 한국의 건축 양식상 획기적인 것이다.

 

                 * 김보록(金保祿, Robert, 1863~1922, 바오로) 신부 *

로베르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엉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 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 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 후 대구에서 30년간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 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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