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근 성지 입구 ▲
* 성물판매, 쉼터 ▲
* 무척 더운 날이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면서도 살이 따가워 힘들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돌아가고 난 뒤 신부님이 직접 걸레질에, 구석 구석 청소를 하고 다니셨어요.
얼굴은 땀벅벅에 벌겋게 되셨어도 신부님은 계속 웃으시면서 행복해 보이셨어요.....
(예수님을 뵈었습니다...감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설립의 요람이며 전파의 중심지이자 신앙 선조의 순교터
양근 지방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양근에서 살던 윤유일( 바오로)은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로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00년 5월 윤유오(야고보), 유한숙(일명 사겸) 등 7명이 체포되었고,
양근의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은 1800년 6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0월에는 경기 감영(현 적십자 병원 자리)으로 이송되어 감사 앞에서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경기 감영에서 형벌을 받던 예비 신자 조용삼(베드로)은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신유박해 당시 조정에서는 해읍정법(亥邑正法)의 영을 내려 모든 지방 신자들을
거주지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윤유오 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은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윤점혜(아가타)도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도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3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신자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윤유일의 삼촌 윤관수(안드레아)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잔인하였던 양근 군수 정주성에 의해 이재몽·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윤점혜와 활동한 이 아가타 등이 양근에서 처형되었고,
양근 출신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토마스)이 옥사하였다.
이와 같이 양근 지방은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다.
이곳 성지에서 우리는 윤점혜 아가타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 순교자
◆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하느님의 종 125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순교자 권 데레사(1784∼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 순교자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수조차 없어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순교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하느님의 종 125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순교자 조숙 베드로 (1787∼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조숙(趙淑)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거주지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윤유오 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은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윤점혜(아가타)도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도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3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신자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윤유일의 삼촌 윤관수(안드레아)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잔인하였던 양근 군수 정주성에 의해 이재몽·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윤점혜와 활동한 이 아가타 등이 양근에서 처형되었고,
양근 출신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토마스)이 옥사하였다.
이와 같이 양근 지방은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다.
이곳 성지에서 우리는 윤점혜 아가타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 순교자
◆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하느님의 종 125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순교자 권 데레사(1784∼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 순교자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수조차 없어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순교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하느님의 종 125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순교자 조숙 베드로 (1787∼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조숙(趙淑)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