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무영은 강화읍내 중심 도로에서 약 100m 강화 성당 방향으로 올라오면 왼쪽에 은혜교회가 있고
이곳에 진무영 관련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200m 더 올라가서 있는
강화 성당 있는 부근 정도 까지가 진무영터가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퍼옴
* 병인양요를 촉발시킨 최인서, 장치선 등의 순교 터 *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軍營)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 회장 최인서 요한, 장주기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의 형 박 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 회장 최인서 요한, 장주기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의 형 박 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세와 충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박해 또한 극심하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세와 충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박해 또한 극심하였다.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진무영에서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성인의 조카 장치선이며,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의 형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무영에서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성인의 조카 장치선이며,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의 형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Roze, 魯勢) 제독의 강화도 출병을 촉발하였다.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Roze, 魯勢) 제독의 강화도 출병을 촉발하였다.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년) 9월(양)과 10월 등 2차에 걸쳐
프랑스 함대가 서울 한강 연안(1차 정찰)과 강화도를 침범(2차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프랑스 성직자 9명이 처형된 사실을 추궁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는 함대 7척에 병사 800~1,200여 명을 파견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서울 한강 연안(1차 정찰)과 강화도를 침범(2차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프랑스 성직자 9명이 처형된 사실을 추궁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는 함대 7척에 병사 800~1,200여 명을 파견하였다.
10월 초 강화도 근해에 정박한 함대는 포함과 연락선을 강화 갑곶에 파견, 마침내 상황은 전투로 발전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지만, 문수산성 전투와 정족산성(전등사)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 군은
강화읍을 불 지르고 11월 11일 강화 점령 1개월 만에 후퇴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다.
강화부를 점령하였지만, 문수산성 전투와 정족산성(전등사)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 군은
강화읍을 불 지르고 11월 11일 강화 점령 1개월 만에 후퇴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다.
◆ 최인서 요한 (1811~1858)
일명 영준(英俊).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1839년경에 용인 교우 이학진의 권유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김씨와 혼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상처 후 주 데레사와 재혼하였고.
서울 아현에 거주하며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물론 홍봉주(토마스)?정의배(마르코)?최형(베드로)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서상기(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邊門)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1839년경에 용인 교우 이학진의 권유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김씨와 혼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상처 후 주 데레사와 재혼하였고.
서울 아현에 거주하며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물론 홍봉주(토마스)?정의배(마르코)?최형(베드로)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서상기(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邊門)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초 병인박해가 일어났으며,
10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최인서는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에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년 4월(음)에 장치선, 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장사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박순집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10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최인서는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에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년 4월(음)에 장치선, 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장사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박순집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 장치선 (1830~1868)
세례명은 미상,
그는 장주기(요셉)의 조카로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도 분명히 지었을 것이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허다한 경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가 만나보지 않은 선교사가 없었으니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주교.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리델, 칼레,
페롱, 오메트르, 볼리외, 위앵,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을 경향 각처에서 만나 보았다.
그는 장주기(요셉)의 조카로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도 분명히 지었을 것이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허다한 경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가 만나보지 않은 선교사가 없었으니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주교.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리델, 칼레,
페롱, 오메트르, 볼리외, 위앵,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을 경향 각처에서 만나 보았다.
그는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는 리델 신부를 탈출하게 하고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여 침략하게 하며 국내의 정세를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 등에게 긴밀히 연락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실행한 교인이었기 때문에
연루자들이 모두 잡힐 때까지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강화도에서 최인서와 함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퍼옴]
그는 리델 신부를 탈출하게 하고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여 침략하게 하며 국내의 정세를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 등에게 긴밀히 연락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실행한 교인이었기 때문에
연루자들이 모두 잡힐 때까지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강화도에서 최인서와 함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퍼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