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서울 관악구에 있는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직자인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하여 모방(베드로) 신부와 샤스탕(야고보) 신부가
순교 후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마포구 노고산을 거쳐
약 60년간 안장되었던 거룩한 곳이다.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고 몇 명의 신자들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박 바오로 등 몇몇 신자들은 마침내 세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4년 뒤 그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곧 지금의 삼성산이다.
신자들은 훗날을 위해 그 이장 연도와 세 순교자의 이름을 아직 마르지 않은 회 반죽에 글을 써서
자연스럽게 마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명동 대성당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다시 삼성산으로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였다.
이들 3명은 1857년에 모두 가경자로 선포된 데 이어 1925년에는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 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 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샤스탕 신부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