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성지순례

이정은

2013. 6. 2. 오전 2:29:17



    * 배론 성지 입구 ↑





    * 성 요셉 성당에서 미사참례   ↑ ↓

성지에 관한 간단한 설명과 소공동체의 중요성에 관한 강론을 들었습니다.
배론성지는 처음이신 분이 없으셔서 간단한 설명,
신자들이 소공동체를 모임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부분의 우려와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공감...




    * 배론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   ↑ ↓











    * 황사영 백서 ▼ 를 쓴 토굴 ▲








 
     * 순례자의 집(피정의 집) ▲







    * 무명 순교자의 묘 ▲









   * 대성당  ▲ ▼





    * 대성당 ▲ ▼













     *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 ▼





    * 묵주기도 ▲ ▼









     * 가는 곳마다 아기 다람쥐가 많았습니다.
       아직 아기라서 사람소리를 듣고도 피하지를 않네요.
       귀엽지요?


       
박해시대 교우촌이며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을 간직한 순교자들 요람지

배론[舟論]이란 명칭은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한 것에서 부쳐진 이름으로,
본래는 팔송정 도점촌이다.
신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신유박해 때 황사영( 알렉시오)이 이곳의 옹기 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을 적은 이른바 《백서(帛書)》를 작성했던 곳이다.
이 백서를 북경 교구장 구베아( 알렉산델) 주교에게 보내려다 체포되어 황사영을 비롯하여
이에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1855년 초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 요셉)의 집에 페레올(요셉) 주교 사후에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매스트르 신부가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장 푸르티에(가롤로)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미카엘)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장주기는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신학교가 최초의 신학교였다.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약 5개월 간 배티에 가매장했다가 
이곳 배론으로 그 시신이 이장되어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안장되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의 여파로 장주기,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두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장주기는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장주기는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배론 교우촌은 박해가 끝나면서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다.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격식을 갖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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