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재 성지순례

이정은

2013. 5. 30. 오후 10:51:51

    ▲ 묘재 성지 가는 길에 학산 공소



    ▲ 정겨운 공소...


 



    ▲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새소리들속에서 듣는 종소리...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한번만 살짝 당겨봤습니다)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성인의 유택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묘재에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성인의 유택이 있다.
성인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한 곳으로 성인이 순교한 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은 조선 후기의 남인계 학자로  장성한 뒤, 백부인 남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이 많은 영항을 주었다.
22세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 영해 도호부사 등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며,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러시아는 1860년의 북경 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조선과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러시아인들이 자주 조선에 월경을 하거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는 남종삼의 상소문과 국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회동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주교들과 대원군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상황이 바뀌어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과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천주교 접근으로 인해 반대파 대신들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아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는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박해가 내려지기 이전에 대원군으로부터 설을 쇠기 위해
양부가 있는 묘재로 내려갈 것을 권유받고,
낙향하였다가 그 후 조정의 박해 소식에 놀라 변장하고 피신하다가
1866년 3월 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반 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가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대신들은 그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유배 보낼 것을 주청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처 이씨(李召史)와 두 딸, 막내아들을 창녕현 한곳에 같이 보내도록 조처하였다. 
남상교는 1866년 4월 17일 공주옥에서 옥사하고,
남명희(南明熙, 1853~1867)는 1867년에 전주에서 교수형으로,
이조이(李召史)는 1875년 3월 2일 창녕현에서 교수형으로 치명하였으니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1817∼1866)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현감이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으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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