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성지순례 (신리 성지)

이귀연

2013. 3. 3. 오후 5:36:23











아픔 없이는 님들을 기억할 수 없는
이곳 신리성지에 오면
들판에 부는 바람조차
님들의 목쉰 소리로 우리를 부릅니다.
복음을 증거하다 목숨 바친
순교 성인들과 동료 순교자들
이름 없이 잊혀지며 죽어간 순교자들께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힙니다.
그 한결같은 신앙의 삶 닮지 못한 부끄러움
이토록 아름답고 유서 깊은 성지를
더 소중하게 가꾸고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
뉘우침의 기도로 봉헌하며 우리 마음 안에 먼저
기도의 기념비 하나 세우며 촛불을 밝힙니다.

눈물 없이는 님들을 기억할 수 없는
이곳 신리성지에 오면
매번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속에
목자들과 교우들이 미사 중에 주고받던
그 애절한 신뢰의 눈빛이 보이고
훗날 한국교회의 보물이 될 사료정리를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 땀 흘리던
다블뤼 안 주교님의 글씨 쓰는 손길도 보입니다.
언제 잡혀갈지 몰라
살아서도 이미 죽음을 체험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한숨소리도 들려오고
박해의 칼 아래 무참히 스러졌기에
죽어서도 목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무명 순교자들의 마지막 신음소리도 들려옵니다.

지은 죄도 없이 어둠 속에 숨어 살았던
님들의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밝음 속에 웃고 지냅니다.
피 흘려 신앙을 증거한 님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자유 속에 편히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살아온 날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해인 수녀의 ''신리성지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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