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친 믿음에 다시 숨을
서석희 요셉 신부
오래전 TV 광고입니다. 한 장년의 남자가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 다닙니다. 좋은 곳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굴에는 도무지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딜 가도, 뭘 먹어도 재미가 없어........ 없어........“ 그러자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피로한 거예요.“ 피로회복제를 소개하는 광고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피로한 거예요.“
우리 삶에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보아도 기쁘지 않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감흥이 없고,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쉽게 지칩니다.
세상이 재미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너무 지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미사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지쳐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의미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메말라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봉사가 부담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붙어 있는 힘을 잃어버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을 탓합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 ”나는 왜 이렇게 신앙생활을 못할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르게 말합니다.
지친 신앙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합니다. 메마른 영혼은 꾸짖음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사실 복음서를 보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고, 중요한 순간마다 엉뚱한 말을 했고, 십자가 앞에서는 도망쳤습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잠깐 등장하는 ’백인대장‘, ’사마리아 여인‘,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 같은 이들이 더 믿음 있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결국 그 둔하고 느리고 자주 넘어지던 제자들을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느렸지만 주님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계속 들었습니다. 자주 넘어졌지만 주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간들이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쌓이고, 주님의 사랑이 쌓이고, 주님의 용서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셨을 때, 그 모든 것이 살아났습니다. 두려워 숨어 있던 제자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닫힌 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답답하고 느리고 굼뜨던 제자들이 확신에 찬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힘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묻혀 있던 믿음을 다시 깨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들었지만 잊어버린 말씀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우리가 받았지만 식어 버린 은총을 다시 타오르게 하시고, 우리가 시작했지만 지쳐 버린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이 더디고 굼뜨게 느껴질 때 너무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해도 답답하고, 미사에 와도 마음이 잘 모이지 않고, 봉사를 해도 기쁨보다 피곤함이 먼저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 하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신앙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쳐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숨을 다시 받아야 할 때가 온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닫힌 문 안에 있는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 강림은 회복의 사건입니다. 두려움의 회복, 믿음의 회복, 사랑의 회복, 사명의 회복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친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숨을 받아, 다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2026/05/24 전주교구주보에서 옮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