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수련

2007. 7. 31. 오전 1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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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수련 

 

자기 수련이 초심자에게나 오랫동안 정진한 사람에게나 간단하지 않고 쉽지 않은 것은 공통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력하는 만큼 편해지고 자유로워짐을 경험하는 것 또한 공통적입니다. 자기 수련의 필요성도 따지고 보면, ‘격정’이란 짐 때문입니다. 이 점 또한 누구에게나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짐이 있고 족쇄가 있습니다. 평생동안 ‘강아지’(dog)처럼 졸졸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격정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말합니다: ‘격정을 사로잡으면, 유익하다. 그러나 격정에 사로잡히면 무익하다.’ 그러나 흔히 ‘바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듯이, 그야말로 ‘정신 없이’ 살기 때문에 격정을 사로잡는지 아니면 격정에 사로잡히는지를 모르며 살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수련에 있어서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맞춰서 관찰하는 것이 자기 수련의 기본이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인성은 본성을 에워싸고 있는 껍질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겉사람인 인성은 능동적이고, 뿐만 아니라 생각을 안 하여도 기계처럼 습성과 타성에 의하여 잘도 나섭니다.

여기에 비하여 속사람인 본성은 수동적입니다. 따라서 본성은 의도적으로 끌어내도록 하지 않으면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듯이, 무의식 속에 잠겨있기를 잘합니다. 그래서 이런 양극성을 역전시키며 변화시켜야 합니다. ‘본성은 능동적으로, 인성은 수동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성(겉사람)과 본성(속사람) 사이의 거리를 점점 넓히라’고 권합니다. 이를 계속하면서 마침내 본성은 전면으로 나오고, 인성은 배경 속으로 물러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자기 관찰을 하면서 수련에 정진하지 않으면, 잠시 방심하는 동안, 어느새 인성이 전면에 나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격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강박충동이 ‘욱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자기 관찰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잠에서 깰 때, 5분간 자기 관찰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24시간을 단위로 하여, 자기 기억을 되살리며 자기 관찰을 합니다. 기억에 남는 것 가운데서 자기 관찰을 하기 마련이지만, 특히 격정과 관련하여 관찰하는 것입니다. 하루 동안 내가 격정에 사로잡혀서 말하고 행동한 것이 어떤 것이었고, 그 결과나 반향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핍니다.

이런 자기 관찰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상이 요청됩니다. 자기 관찰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에니어그램 수련에 있어서 ‘깨어 있음’ ‘깨달음’ ‘집중’ 이 세 가지는 늘 맞물려 있는데, 그 중 어느 것도 명상과 관련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명상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상 가운데 억지로 기억을 끌어내듯이 되살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바르게 편한 자세로 앉아서 할 수 있는 만큼 심호흡을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명상의 효험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의도적인 노력에 의하여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내면의 침묵 가운데 깊은 명상을 시작하면, 그냥 편안한 가운데 기억이 떠오르면 그 기억 속에서 자기 관찰을 시작합니다. 특히 기계적인 삶에 저항하며 살기로 마음을 정하고 수련하는 이에게는 이와 같이 명상 가운데 자기 관찰을 하면, 예를 들어서 격정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생각과 느낌을 가다듬고, 그 다음에 고요히 명상합니다.

애써서 격정을 이겨내는 노력이 논리적으로 보면 쉬울 듯 싶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실상 에니어그램 수련을 하는 이들은 아홉 가지 격정 가운데서, 자신의 성격 유형의 독특한 격정을 의식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수련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일반 교양에서나 윤리 교육이나 영성 수련에서 익힌 것처럼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아홉 가지 격정으로 지칭되는 죄를 회개하고, 아홉 가지 덕목으로 지칭되는 장점을 똑같이 살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노력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누구라도 아홉 가지 죄를 모두 회개하려 하면, 하나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아홉 가지 격정을 모두 이겨내려 하면, 한 가지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독특한 죄와 격정을 회개하고 이겨내려 하면, 그것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오로지 그 때에만 나머지 여덟 가지가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에니어그램 수련을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점을 살피게 됩니다. 마이클 라이스(Michael Ryce)가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또 생기는가?’ (Why Is This Happening To Me Again) 라는 제목으로 책도 쓰고 주제 세미나를 지도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물음을 일생을 두고 수없이 되풀이하며 묻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생을 두고 같은 형태의 사건, 사고, 실수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원인도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동안 지나고 나면, 동형 반복적인 사건, 사고, 실수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동형 반복적인 문제 속에 는 격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살 뿐입니다. 그래서 흔히 ‘나이 들면서는, 성격이 운명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생각 없이 감정에 치우쳐서 중요한 일을 그르치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격정에 끌려가든가 사로잡혀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관찰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격정에 사로잡혀서 행동한 결과로 사건이나 사고나 실수를 경험했다고 가정합시다. 다음 순간, 자기 기억과 자기 관찰을 진지하게 하면, 적어도 똑같은 잘못이나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습니다.

자기 관찰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기 객관화’ 또는 ‘자기 초연’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지식과 세계 지식, 자기 의식과 세계 의식,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입니다.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네 번째 수준의 인간이 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본능에 의하여 사는 첫 번째 수준의 인간, 매사 감정에 치우치는 두 번째 수준의 인간, 감정은 메마른 채 생각과 지식만 앞세우는 세 번째 수준의 인간 등을 뛰어 넘어서 본능과 감성과 지성, 이 세 가지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네 번째 수준을 향하여 수련하는 과정으로서 자기 관찰이 중요한 것입니다. D(행동), F(느낌), T(생각) 이 세 가지의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면, 이루가 격정을 사로잡을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집니다.

자기 관찰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흔히 유혹과 함정에 빠집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기피하는 것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다 결국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격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따라서 각자가 지닌 기본적인 욕망을 이루지는 못하고, 그 반대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자기 관찰은 늘 깨어있음을 위하여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것임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기계적인 삶에 저항하여 살기 위한 기본입니다. 우리가 자기 관찰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간격이 뜨다가, 수련에 정진하면서 자기 관찰의 시간과 빈도와 강도가 점점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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