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딸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네 안에 계신다.-이기양 신부님

2006. 12. 8. 오후 5:15:48

글자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시온의 딸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네 안에 계신다.

 

제 1독서 : 창세 3,9-15.20 (나는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제 2독서 : 에페 1,3-6.11-12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복    음 : 루카 1,26-38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사람마다 본명이 있고 또 성당마다 수호 성인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티 없으신 성모성심’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지요. 한국 천주 교회의 주보 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에 가면 제대 뒤쪽의 한 가운데에 우리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를 모셔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 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에 조선에 도착한 앵베르 범 주교는 혹독한 박해와 시련을 겪고 있는 한국 교회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하며 간구 해주실 것을 청하셨습니다. 4년 뒤인 1841년 8월 22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요셉 성인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한국 교회의 수호자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나서 한국 교회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찾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특은을 입은 교회 중의 하나로써 194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민족이 36년 간 계속되던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이 됐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또 기리면서, 성모 마리아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가 어떤 분이신 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우리는 성모마리아의 신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전하자 처녀 마리아는 깜짝 놀라 외칩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어느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똑같은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지금 하느님의 천사가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1,35)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며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통하여 마리아는 이 놀라운 사건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되고 주님의 여종으로서 그 뜻에 순명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신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신앙의 어머니로, 또 신앙의 완전한 모범으로 모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봉헌하였습니다. 무조건 따랐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일어난다고 하는 그 순간에 성모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마리아는 너무나도 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당장 약혼자인 요셉이 파혼하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그리고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처벌될 위험에 놓이게 되지요.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요셉에게 보내어 그의 마음을 돌려놓으시고, 요셉의 보호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십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후 끝없는 시련에 봉착합니다. 들어가 하루 밤 몸 누일 곳조차 없어 초라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으며, 해산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들이 이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는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처절한 고통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험난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간직하며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는 말씀에 인간적인 모든 것을 접어놓고 전 생애를 봉헌했던 그 신앙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으로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성모 마리아의 신심을 가슴에 담고 또 기억하며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의 군대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지요. 과연 제대로 잘 따르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임을 확인하려들지도 않을뿐더러 조금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요. 신앙과 이성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수준의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과학이지요. 과학에서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까지도 과학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의 사고나 능력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힘, 즉 성령의 능력을 확신하였기에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맹신이나 미신으로 치부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인간의 이성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지요. 신앙은 인간의 학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하느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이성과 학문과 모든 경험과 사고와 예측을 접고 주님께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나의 판단과 이성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뛰어넘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그 동안 내가 고집하고 매달려온 모든 가치와 지식이 얼마나 하찮고 무가치한지를 한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알아가게 되지요. 인간적인 모든 것이 참으로 무의미하고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간적인 판단에 앞섰던 과거가 오류의 역사였다는 것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서 나의 체험과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면 쓸수록 우리는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그 안에 갇히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한계를 뛰어넘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모마리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은 나의 경험과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겠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은 천사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전달받으셨습니다. 성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스라엘의 역사나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뜻은 천사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접할 수가 있었지요. 또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성경 해설을 통해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어떻게 체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달받습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사목자의 사목 흐름 안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을 해설하고 실천하는 본당 사제의 여러 사목 활동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벗어나 신자 스스로가 하느님의 뜻을 찾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고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목자, 즉 사제를 통해서 가르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목자의 사목 흐름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깨닫고 순명의 정신으로 따르는 사람과 인간적인 생각만을 앞세워 지나쳐버리는 사람과의 삶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많은 사목 경험을 통해서 저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살기를, 또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사목자의 뜻에 귀기울이고 받아들이시기를 권합니다. 하느님은 그 안에 계십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 한마디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받아들였듯이 여러분 또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풍요로운 은총이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역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한 평생 순명하신 성모 마리아의 전 생애 위에 내려진 축복의 열매라는 것을 우리는 성모님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을 담고 실천하여 풍요로운 은총을 체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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