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교회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을 4천년동안 기다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제1 독서(예레 33,14-16)는
예레미아가 활동할 무렵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2열왕 24,19-25,7)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자기 이름이 “주님은 나의 정의”라는 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드키아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를 보장해주지도 못했고,
평화를 유지하지도 못했으며,
바빌론 왕 네브카드네자르의 위협에서 자기 백성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참된 임금이신 구세주가 오시는 날에는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모든 백성을 살릴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구원의 날이 오면 왕권과 사제의 권한이 하나가 될 것이며,
남쪽 유다가 구원을 받고 북쪽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예레 23,4-6)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이란 다름이 아니라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아 예언자를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서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물론이요(예레 21,13)
이스라엘 백성도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라고(예레 22,3) 가르치십니다.
다윗처럼 공평과 정의를 실천할 때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십니다(예레 22,15).
우리도 역시 구원의 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공평과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제2 독서(1테살 3,12-4,2)에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의
앞부분을 마감하는 기도(1테살 3,10-13)를 통하여
테살로니카 공동체의 넘치는 사랑의 실천에 감사를 표현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흠 없이 거룩한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자상하게 가르쳐주십니다.
다시 한 번 테살로니카를 방문하고 싶은 열망을 표현했던(1테살 3,10)
바오로 사도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인 사랑은 먼저 공동체 안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외부로 확산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흠 없고,
거룩한 사람으로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만이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테살로니카에서 했던 설교를 상기시키면서(1테살 4,1-2)
아주 간략하게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21,25-28.34-36)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13,10; 에제 32,7)을 그대로 인용하고
다니엘 예언자의 현시(7장)를 요약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신앙인들의 태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메시아를 지칭했던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타나나실 때에는
우주의 모든 현상들에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날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우주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징후도
모든 이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징후가 나타날 때에는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실 것이기(시편 3,4)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심판의 날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다시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공포와 구렁과 올가미”(이사 24,17)가 덫처럼 갑자기 덮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이는 주님의 날에 대한 징후를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은
세상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해방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 때문에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무뎌진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오심이 오히려 공포의 소리로,
죽음의 올가미로 느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잘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그대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결정적인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뵙게 된다는 희망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정의와 공평과 더불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아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대림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도
이 시기가 되면 훈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더욱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주었듯이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깨달음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하고,
다음으로 이웃으로 확산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대림절을 지내면서
구원과 평화와 회개를 깊이 묵상하기를 권고합니다.
정의와 공평과 더불어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오래된 전통으로서 네 개의 촛불을 밝히면서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삶을 묵상하도록 권고합니다.
이분들의 삶이야말로
주님의 날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살았던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첫 번째 촛불의 의미는
갑작스럽게 다가올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사랑의 실천을 뜻하고,
두 번째 촛불은
신앙생활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갖추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는 의미이고,
세 번째 촛불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의미이고,
네 번째 촛불은
구원의 구세주와 인간의 만남을 묵상하게 합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대림기간동안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구세주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목표를 정해봅시다.
[강론] 대림 1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6. 12. 3. 오전 7:32:01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