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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0, 27-30.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초기 교회가 그분이 어떤 목자이신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 23장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고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계셨고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그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살기 위해 또 성장하기 위해 힘씁니다. 식물이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고, 동물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현상이 모두 생명체가 지닌 개체유지 본능의 발로입니다. 인간에게도 그 본능이 있어서 재물을 비축하고, 권력을 얻어, 강하게 살고자 하며, 노후 대책을 마련하여 오래 동안 무사히 살 것을 바랍니다. 인간은 공부하여 그 사회가 인정하는 자격증을 취득하여 그 분야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로 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 안에서 개체유지를 효과적으로 하겠다는 본능적 욕구가 작용하여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입니다. 이 욕구는 인간이 사회 안에서 떳떳이 또 활발하게 사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 욕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욕구를 긍정하고 칭찬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그 욕구가 자유롭게 충족되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 보호합니다.
신앙인은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는 질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다른 질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신앙인은 그 나라의 질서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욕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살아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가치관으로 된 질서, 곧 하느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인류 안에 있는 개체유지 본능은 이기적 욕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만 열심히 살아서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권장하던 것이 각자 율법을 잘 지켜서 자기 한 사람 잘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이웃을 돌보고 가엾이 여겨야 한다는 이스라엘 초기의 신앙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적 믿음이 되었습니다.
인류 안에 있는 개체유지 본능은 또한 자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망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율사와 제관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역할을 빙자하여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종교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는 권위주의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오는 망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그런 이기적 신심과 지도자들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생명이 열어주는 질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베푸셔서 이 세상에 생명들이 살아있게 하십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하느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버리지 않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친 몹쓸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말씀으로 그 사실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그분의 질서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바로 그 자비의 질서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개체유지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만자족할 수도 없고, 자화자찬할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과대 망상할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대가 없이 봉사하는 질서를 가르치셨습니다. 개체유지만을 생각하는 좁은 자기의 세계를 벗어나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열어주는 넓은 질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개체유지에 골몰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질서의 세계를 향해 나선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그들은 나를 따른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좁은 세계는 인간 개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되어 보겠다고 이해타산하며 전전긍긍하는 세계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면서 환희에 젖는 체험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우리의 지상 생존이 끝나면서 함께 없어지는 세계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대중가요의 한 마디가 그 세계의 허무를 대변합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미움에 젖고, 분노에 시달리다가 빈손으로 떠나야 하는 세계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의 세계에는 ‘내어주고 쏟음’이라는 질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또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살기에 그분과 더불어 지속되는 세계에 삽니다. 예수님이 사셨고 또 부활하여 사시는 세계입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을 성소(聖召) 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와 수도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관심을 기울이자고 제정한 날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는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대가 없이 ‘내어주고 쏟는’ 하느님이 중심이신 질서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이 길은 생존 경쟁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도 받고 생계도 유지하고자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한 사람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 신앙인 모두는 각자 자기의 능력대로, ‘내어주고 쏟음’을 삽니다. 예수님이 펼쳐놓으신 하느님 중심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
2007.04.29 /[강론] 내어주고 쏟음[서공석신부님]
2007. 4. 30. 오전 9: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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