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어졌다.”
<하느님이기를 포기하신 하느님>
사순시기의 절정인 성 금요일에 서게 되니 부끄럽게 흘려보낸 지난 사순절을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절제도, 희생도, 사랑의 실천도, 기도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옷깃을 여며야겠습니다. 성삼일 기간 동안 만이라도 제대로 한번 살아봐야겠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낼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하기 위해서, 이를 통해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뭐니뭐니해도 자기 통제인 듯합니다.
성인(聖人)들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기본적인 덕행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절제의 덕이었습니다. 이는 육체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몸이 이끄는 데로 살아서는 절대로 성화의 길,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한창이던 시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며 친구들에게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절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었습니다. 감나무 그늘 아래 넓은 평상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뭉게구름 사이로 풋감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친구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갖은 고생이며 현재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을 담담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친구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슨 그런 고생을 많이 했는지, 그간의 사연만으로도 소설 몇 권은 쓸 정도였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친구의 인생, ‘쌩고생’으로만 점철되어온 친구의 불행한 인생 앞에 제 불행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습니다. 제 인생은 그야 말로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친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친구의 사연을 듣고 난 이후로 저는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불평불만이 ‘쑥’ 들어갔습니다. 그나마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 나는 살만하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은 감사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시험에 한번 낙방한 재수생, 처음에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분노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후회와 원망으로 하루하루를 지새웁니다. 그런 고통이 한 순간에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삼수생을 만날 때입니다. 삼수생을 보며 ‘저런 사람도 있는데...’하며 다시금 자신을 추스릅니다.
마찬가지로 상가 분양에 투자해서 1억을 날린 자매님이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하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합니다. 억울해서 밤잠조차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크게 호전될 때가 있습니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 가운데 똑 같을 케이스로 사기당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2억을 손해 봤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나마 나는 다행이군’하며 억울함이 어느 정도 가실 것입니다.
암 진단을 받은 형제님이 계십니다. 다행히 초기였습니다. 그러나 ‘잔 병 한번 앓지 않았던 나였는데...’ 하며 현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조금씩 얼굴이 펴졌습니다. 바로 옆 침대에 새로 들어온 말기암 환자 때문이었습니다.
묘하게도 인간은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을 불행을 극복해나가곤 합니다. 우리의 이 고통,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극심한 고통이 경감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은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고통의 가장 극점에 서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수난의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가운데 가장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겪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 금요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가장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맛보시면서, 한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처참하게 돌아가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고통의 가장 극점에 서셔서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시기 위해서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와 완전히 일치하시기 위해 인간 존재의 연약함까지 나누어가지신 하느님, 이것으로도 양이 차지 않은 나머지 체험하지 않으셔도 좋을 죽음을 직접 체험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느님이기를 포기하신 하느님, 우리를 위해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내동댕이 쳐버리신 하느님, 우리를 위해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위까지 등 뒤로 던져버리신 하느님, 우리를 위해 죽음까지 겪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본질상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고, 그분께서는 본질상 죽음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십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가 새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가 새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용감하게 또 분명하게 고백합시다. 망설이는 마음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수치심을 지니고서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고백합시다. 이것을 잘 이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