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1 주간 금요일.
2006. 11. 10.
중계본동.
필리 3, 17-4, 1.
루카 16, 1-8.
오늘의 말씀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축냈던 불의한 집사(예전의 청지기가 익숙해서 그런지 더 정겹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에 의해 해고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 해고를 당하게 된 집사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주는데, 이것을 주인은 칭찬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러한 행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비유는 일단 그 배경부터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등장하는 주인은 엄청난 부자입니다. 집사가 삭쳐준 기름 쉰 항아리나 밀 이십 섬은 오백 데나리온(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은 족히 되는 분량이지만, 주인은 그것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부자들은 집사를 두고 그 재산을 관리하게 하는데, 집사로 있는 동안에는 주인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재산을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집사는 그 권한을 남용했기 때문에 고발을 당했던 것이죠. 그리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 역시 기름 백 항아리나 밀 백 섬을 빌릴 수 있을 정도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배경에서 집사가 자리를 빼앗길 지경에 이르자 그는 궁리를 합니다. 부자인 주인의 집에서 집사를 하다가 쫓겨났다 해도, 그가 땅을 파거나 빌어먹는 것은 체면이나 위신을 중요시 여기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이름난 부자의 집에서 집사를 보던 이가 해고되었다면 그 좋지 않은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것이므로 그는 다른 방도를 찾았어야 합니다. 그 방도로 생각해 낸 것이, 인계인수를 하는 그 기간 동안은 자신에게 아직 권한이 있으므로, 그 기간에 빚진 이들의 빚을 삭쳐 주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이지만, 그는 자신이 사는 방법으로 그것을 택했습니다. 고대 세계는 상호성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였는데, 호의를 받았으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사에게 은혜를 입게 된 많은 사람들은(이 외에도) 자신에게 적절한 호의를 베푼 집사에게 적절하게 보답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러니 집사는 이 행동으로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확보한 것입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 일이 들키게 되었을 경우에 중형을 받게 될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것은 그들이 중요시여기는 체면, 위신과 관계됩니다. 아직 해고당한 사실이 퍼지지 않은 시간에 집사가 빚진 이들의 빚을 탕감해 줄 때, 그 소문은 금새 돌 것이고, 그 주인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밝혀낸 후 채무관계를 원상태로 돌리면, 그 재산을 다시 돌려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에 관한 좋은 소문은 철회되거나 오히려 역반응을 보이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체면이나 위신을 중요시여기는 사회에서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가 시킨 것처럼…. 돈은 엄청나게 많으니 말이죠. 주인은 그저 그 상황에서 그런 지혜(얍삽하지만)를 짜낸 그를 칭찬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하죠.
예수께서는 그가 불의한 방법으로 대처했지만, 세속의 자녀들이 그렇게 영악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주님의 나라를 얻는 데에도 슬기롭게 대처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창고에서 그 재산 즉 달란트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즉 이 집사처럼 관리자라는 것이죠. 이것은 주님의 재산을 맡아보는 사람이므로 그 주인의 뜻에 맡게 써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나의 삶이 그런 삶을 살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축내는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나의 책임을 물으시려 한다면(이것은 심판의 때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이 세속의 자녀인 집사처럼 어떻게 하면 나의 미래(이것은 결국 구원의 문제 아니겠는가?)를 위해 처신을 고민하면서 재빠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집사처럼 주인인 주님의 창고에서 좋은 것을 꺼내 다른 이들의 빚을 삭쳐주는 것입니다. 주님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우리는 모두 빚을 진 사람이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용서하고 나의 달란트를 쓰는 것이죠.
내가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내 삶이 주님의 뜻에 맞갖지 않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좀더 슬기로우면서도 재빠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굼뜨고 더딘 모습이 아니라 재빠르게 응답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