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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07. 3. 19. 토평동.
2사무 7,4-5ㄴ.12-14ㄱ.16. 로마 4,13.16-18.22. 마태 1,16.18-21.24ㄱ.
다른 분들도 그러시겠지만 가끔씩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현현하시면서 구약에서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나자렛에서 뭐 신통한 것이 있겠냐?’느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비아냥을 듣지는 않으셨을텐데, 왜 그러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오늘 요셉 축일을 기념하면서 문득 든 생각은 가족의 소중함,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항상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모임을 자주 가지려고 하고, 그런 가운데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회를 자녀들이 가지도록 합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 신앙을 나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자녀들은 그런 신앙적 기반 위에서 자라나게 되고, 그 부모의 모범을 익히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그저 이론만이 아니라 자라나는 과정 속에 자연스레 삶과 함께 스며드는 것이죠.
혹 ‘그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다’ ‘나도 많이 노력해 보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게 씨가 안 먹히고 또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부하는 것도 그의 자유이고,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그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자녀들을 그냥 두진 않습니다. 왜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고, 먼저 살아온 인생의 선배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에 인도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신앙에 자신이 없기에 자식들에게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앙적인 가르침이 없었으니, 삶으로 가르침을 주지 않았으니 이성을 가지고 판가름하려는 자녀들에게 먹힐 리가 없지요.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의로움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의로움이 무엇입니까?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에 맞갖는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에게 ‘한눈파는 삶’이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일을 하건 그 안에서 늘 주님을 찾습니다. 그렇기에 ‘인간 예수’(신으로서의 예수 말고!)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뜻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뜻을 찾는 참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가족 안으로 들어가 보면 부모로서 그 약속을 지키는 것, 시간을 지키는 것을 소홀할 때가 있고, 그런 가운데 ‘이해해주려니’,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은 오히려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가정에서 약속이 잘 지켜지면 저절로 몸과 마음에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배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에 있어서 철저하게 믿음을 실천하는 모습, 하느님과의 계약을 소홀함이 없는 삶 속에서 아이는 믿음의 아이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설령 그가 사춘기에 방황을 한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뿌리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셉, 마리아, 예수. 그들이 이루는 가정이 성가정이라고 한다면, 또 그 당시의 생활에서 아버지가 갖는 위치가 크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요셉을 선택하신 데에는 큰 뜻이 있었을 것이고, 요셉은 드러나지 않는 삶 가운데서도 오직 삶으로 모범을 보였기에 마리아와 더불어 칭송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 인류 구원의 시작. 이런 원대한 꿈은 나의 의로움에서, 작은 가족의 신앙 실천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다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작은 가족의 신앙 실천 - 조성호 신부님
2007. 3. 21. 오전 9: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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