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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사순 제 4 주간 화요일 2007. 3. 20. 토평동.
에제 47, 1-9.12. 요한 5, 1-3ㄱ.5-16.
많은 사람들이 베짜타라는 못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38년 동안이나 애를 썼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지나 한 사람 즉 38년 동안 앓고 있는 병자에게 다가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1등이 아닌 가장 꼴찌의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신 예수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베짜타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자비로운 예수께서 이 사람에게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아니 천하의 주님께서 그가 바라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원의를 가진 만큼 그 바라는 삶을 살아갈 것이냐?’ 를 묻는 질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으냐?’ ‘사랑받고 싶으냐?’ ‘구원받고 싶으냐?’ 이런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할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그 원의가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하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누구나 있지만,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매일 담배를 물고 살아갑니다.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일치를 위해서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죠.
예수께서는 그에게 ‘건강해지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싶으냐? 라고 번역한 말을 ‘원하느냐?’라고 고치면 이해가 쉽습니다. 내가 진정 원할 때에는 나의 응답이 들어갑니다. ‘테니스를 배우고 싶습니다’ 라고 코치를 찾아갔을 때, 우리는 그가 가르쳐주는 모든 것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원의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테니스를 잘 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신앙인이 되고 싶다면, 믿음의 대상을 믿겠다는 원의와 함께 그분이 시키는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발동시켜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사야가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마리아가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바오로가 그랬습니다. 내가 스스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완전한 변화를 일구어 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강한 의지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의지를 키우고, 강한 결단을 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도록 늘 유혹이 내 앞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질문도 이상하지만, 이 병자의 대답도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네가 건강해지고 싶으냐?”며 “너”를 지칭하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다른 이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핑계를 댑니다. 다른 이유를 댑니다. 주님께서는 그와 단 둘이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자 하시는데,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도 그렇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시고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다른 이들 쪽을 바라봅니다. 나는 건강해지고 구원받고 잘되기를 바라는데, 그 삶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다른 이들에게 향하기를 바랍니다. 계명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등등.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다른 이들을 바라봅니다. 내가 잘 될 때는 주님의 뜻이라 하고, 안 될 때는 그분에 대해서 의심하고 다른 데를 기웃거리면서 미신에 의지하고, 그러고 나서 내가 안 되는 이유를 다른 이들 탓으로 돌리거나 심지어 하느님 탓으로도 돌리는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건강해지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예”라고 답하면서도, 실상은 그런데 다른 이들이 나를 건강해지지 못하게 막아요. ‘다른 이들 때문에 변할래야 변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죠. 아니면 “지금의 내가 왜 어때서요?”하면서 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해묵은 마음의 껍질부터 깨져야 합니다.
“너”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도 “나”를 말씀드려야 합니다. 내 삶의 주체는 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구원자 예수께서 자신 앞에 그렇게 나타나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저 연못만 바라보고 다른 이들이 먼저 들어가는 것만 바라보고…. 그러다보니 제 신세 때문에 한탄만 하고, 불만은 쌓여가고…. 그러나 예수께서는 언제 어느 모습으로 오실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낫고 싶으냐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그때에 나는 과연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
우리는 물에 가까이 있습니다. 베짜타 연못의 병자들이 연못에 가까이 있듯이 나 역시 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낫게 되는 것은 그 물의 치유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
다해 사순 제 4 주간 화요일/지금의 내가 왜 어때서요? - 조성호 신부님
2007. 3. 21. 오전 9: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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