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로 듣는 예레미야서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발 내 말을 들으라고, 그래야 내가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 성이 될 것이라고 하소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고집스럽게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앞으로 가라고 하면 뒤로 가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화답송에서는 시편 말씀을 통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하소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저는 이렇게 완고한 사람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한 민족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시자, 말을 못하던 이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봅니다. 그 답답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겠지요. 우리가 하루만 말을 못하게 해도 얼마나 못 견뎌 합니까? 말 못하는 이의 고통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어 다시 말을 하게 해주셨는데 사람들은 시비를 겁니다. 독서에서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라는 표현을 들었는데, 그들은 정말 조상들보다도 더 고약하게 굽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쫒아낸 사실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니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뒤집어씌운다고 말하지요. 반대를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어떤 구실을 찾아서라도 반대를 하고 시비를 걸고 뒤집어씌웁니다. 참으로 고약하지요. 저 같으면 화가 나서 왜 엉뚱하게 뒤집어씌우냐고 따질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젊잖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쫒아내시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예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안에 와 있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완고한 그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벙어리가 말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사람들은 전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알아보지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 삶 안에서 우리 안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가?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는 더 힘센 자가 나타나면 빼앗겨야 하는 그런 무력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를 내어주는 나라, 우리 마음 안에 세우시는 나라, 바로 사랑의 나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샘솟아 시냇물로 흐르다가 강물이 되고 마침내 바다에 가 닿아 대해의 고요 속에 잠기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시는 일마다 시비와 반대에 부딪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무에게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실 때는 스스로 위로하시기도 했겠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아무에게서도 위로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스스로 자신을 위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짧은 시 하나 들려드립니다.
나를 위로하며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