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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 독서(탈출 3,1-8ㄱㄷ.13-15)는 하느님의 나타나심(1-6), 사명수여(7-8ㄴ), 그리고 이의제기(13-15),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그러나 도입부(탈출 2,23-25)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 이집트에서 노역에 짓눌려 탄식하면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하느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이해가 쉽습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는데 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말해주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동족의 아픔을 지켜보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탈출 2,12) 뒤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시나이 산)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느님은 그냥 놔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천사가 나타난 장소인 불꽃 역시 거룩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창세 15,17; 탈출 19,18; 시편 50,3; 97,3). 모세는 호기심에 불꽃을 보러 가는데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 하느님에 의해 선택되지 않은 피조물은 하느님을 볼 수 없고, 만일 뵙게 된다면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둘째 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해오라는 사명을 수여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약속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으로의 이동입니다. 모세의 이의제기가 생략된 셋째 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사실 야훼라는 이름을 밝히시지만( 창세 4,6) 히브리 민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또는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탈출 20,7; 신명 5,11) 잊어버렸던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은 야훼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며 아주 후대에 와서 “전능하신 하느님”(창세 17,1: 사제계), 또는 “나의 주님”(아도나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까지 오직 이 이름만 통용될 것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시대를 초월하시는 분, 있음 자체, 그리고 만물을 있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오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과 항상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영원성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2 독서(1코린 10,1-6.10-12)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역사에서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성사에, 광야에서 만나(탈출 16,4-35)를 먹고 바위에서 솟은 물(민수 20,7-8)을 마신 것을 성체성사 대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새로운 탈출을 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으면서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받은 코린토 교회 공동체가 교만과 불평으로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므로 회개해야 하며, 이미 자신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자만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3,1-9)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 시작에 나타났던 빌라도(루카 3,1)가 나쁜 짓을 했다는 소식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단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빌라도가 저지른 짓은 주로 갈릴래아에 살면서 활동하던 혁명당원들을 죽여서 그 들의 피를 그들이 제사를 봉헌하려던 제물에 부었다는 이중적으로 파렴치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성전에 바칠 제물을 준비하던 곳에서 이들을 살해한 것 같습니다. 아벨이 그렇게 되었고, 많은 예언자들과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루카 11,51)가 역시 제물에 뿌려졌던 것처럼 아마도 빌라도의 군대에 의해 파스카 축일을 준비하는 날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나쁜 소식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첫째 대답은, 추측해볼 때, 아마도 나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주겠다는(루카 6,41-42) 갈릴래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도 역시 첫째와 같은 식으로 무너진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역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도 나타나지 않는 자료이고, 탑을 세우려면 계산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루카 14,28-30) 우연히 일어난 사건, 혹은 유다인들의 독립전쟁 때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대답을 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래아 사람들에게도 그런 비참한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처참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단 한 가지, 죄로부터의 회개입니다. 죄란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이고 공동체와의 연대성을 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한다는 것은 사랑과 함께 하느님께도 돌아서는 것이고, 공동체와의 친교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갔던 작은 아들이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음에도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루카 15,17-20). 그래서 회개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회복이고 하느님 아버지와는 물론 이웃이나 공동체와의 화해입니다. 결국 회개란 한 번 자존심을 꺾어버리고 그 대신 영원한 웃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말씀 뒤에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비유는 아주 분명한 이야기이면서 결론이 없는 대신에 듣는 이들에게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포도밭 주인의 실망, 끝장을 내려는 주인의 결단,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살려보려는 재배인의 중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도밭(유다인들)에 심어놓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그리스도인)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주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미카 7,1; 호세 9,10). 주인은 포도 재배인에게 앞에서 혼자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삼 년 동안 기다렸던 인내심 (하느님의 세 번의 오심: 아브라함을 통해서<할례>; 모세를 통해서<율법>; 마리아를 통해서<은총>: 성 암브로시오, Exp. Luc., 7,160-171)의 한계를 설명하면서 나무를 잘라버리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마치 빌라도에 의해 죽은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에 있던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예로 나타났듯이 역시 두 가지 잘 못을 했습니다.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밭 주인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포도 재배인의 간청은 놀랄만한 내용입니다. 포도 재배인은 마치 구약성경에서 백성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중재인들처럼(탈출 32,11-14.32; 창세 18,16-33; 민수 11,2; 1사무 7,8-10; 12,19-25; 예레 15,1; 아모 7,1-6) 계급적으로는 낮은 처지에 있지만 대화에 있어서는 승리자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포도 재배인은 나무에게 거름, 즉 나무가 먹고 마실 것을 준다고 하면서 나무와의 연대성을 강조하고, 삼 년을 기다렸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던 포도밭 주인의 마음을 희망으로 바꿔놓으려고 합니다. 중재인은 마지막 기회를 청합니다. 만일 포도밭 주인이 포도 재배인의 간청을 받아들였다면 주인은 그에게 일 년을 다시 주어야 할 것이고, 나무는 다시 한 번 열매를 맺을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이제 중재인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게 된 것이고, 나무의 책임 역시 대단히 무겁게 된 것입니다. 일 년 뒤에는 잘려지느냐, 혹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무에게 달려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 무화과나무이고, 예수님을 포도 재배인으로, 그리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로 알아듣는다면 오늘 복음의 비유를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들을 잘라버리려고 하시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일 년, 또 다른 기회를 청하십니다. 그 기회, 그 일 년은 바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일 년을 허락하실 인내심이 없으시다면 결국 잘라 버려질 것입니다. 그 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서 결론을 내려주시지 않았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통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이들은 어떤 결론을 맺을 것인지 충분히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셨다면 예수님을 통해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이라면, 우리들에게 펼치시는 구원계획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으로 들어감이라면 우리들에게 구원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2코린 2,15)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새로운 탈출을 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으면서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하게 회개하는 것, 즉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
사순 3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 3. 12. 오전 7: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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