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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사순 제 2 주간 수요일. 2007. 3. 7. 토평동.
예레 18, 18-20. 마태 20, 17-28.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21)
예수님의 이 질문 앞에 서 봅니다. 저요? 그야 당신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죠. 무엇이 행복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당신과 함께 살면서 당신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이래저래 정답과 같은 답변을 늘어놓다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무엇을 원하느냐고!
무엇을 원하는가? 그렇게 솔직히 질문 앞에 서 보니 내가 바라는 것,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이랬으면 하는 것 등등. 뜬구름 잡기식의 이상적인 답변이 아니라 평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안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세상을 살면서 바라는 욕심이란 비슷할 거란 생각입니다. 어찌 예수께서 그걸 모르시겠는가? 분명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두 제자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처럼 언짢아하시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그토록 구체적인 수난 예고(마지막 수난 예고인 이 대목은 앞 두 번의 수난 예고보다 구체적이다)를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영광을 좇는 모습이 우선입니다. 그걸 아시면서 다 이해하시는 예수께서는 좀 더 자상한 방법을 택하십니다. 아마도 직접적 대화의 당사자인 예수님보다 제자들이 화를 내었던 것은 자신들의 속내를 들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욕심은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표현을 하든 하지 않든 비슷할테니까.
그러나 지금의 삶이 우선입니다. 누군가 내게 그럴싸한 자리를 약속한다 해도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분명 치러야할 값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다 그렇지만, 유명한 등반가도 저 높은 산에 등정하기 위해서 수많은 훈련을 거듭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영하는 기술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도 해협을 건너기 위해 수많은 훈련을 쌓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또한 실전에 돌입하면 또다시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우리네 삶이 그럴진대 우리는 신앙의 삶에서만큼은 무엇인가 거저 얻으려는 때가 많습니다. 기도 시간 몇 번 내고, 미사 예물 몇 번 봉헌하고, 그것도 온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지 않은 채 거래처럼…. 모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이 많은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죠.
예수께서는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섬김을 이야기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활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내야 한다고,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고 하셨다면 더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섬김이 당신을 따르는데 있어 수난하는 것, 고통을 감내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셨나 봅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숙제라는 것이죠.
“무엇을 원하느냐?”(마태 20, 21)라는 질문의 정답은 ‘이렇게 섬기고 있습니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다해 사순 제 2 주간 수요일./무엇을 원하느냐? - 조성호 신부님
2007. 3. 10. 오전 11: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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