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음 : 루가 9, 28ㄴ-36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 년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연구소에서 밀레니엄시대 새 천년, 새 시대 개막을 앞두고 기획하여 조사한 것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갤럽에서 조사 발표한 내용은 전 세계 각 나라 국민들의 현재 삶의 만족도를 조사하여 국가별 순위를 매긴 것이었습니다.
갤럽에서 발표한 내용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경제 우선주의 시대에서 현실 삶의 최고 만족도를 가진 나라의 국민은, 곧 전 세계에서 삶의 만족도 1위는 바로 인도라는 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의 국민들이 그 다음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인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은 거의 중간 아래순위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 발표를 살펴보면 항상 기뻐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는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국가들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내용의 가르침을 가진 다른 종교를 믿는 국민들이라고 해서 만족도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보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신앙이 참되고 진실한 믿음이 아닐 때는 현실 삶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현실을 만족하며 사는 인간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변화를 원합니다. 자신의 용모와 성격, 자신의 주변의 상황 등, 모든 것에서 인간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있기를 요구하는 사항도 사람들마다 천차만별로 모두 다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해답을 제공해 줍니다. 인간이 희망하는 변화, 그 참된 변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변화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복음의 삶의 자리는 산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기도를 하러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성서말씀에서 산이 상징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난 곳, 다른 차원의 세계, 즉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 전혀 다른 세계를 나타내며 변화의 조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대화의 내용은 예수님이 머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분의 죽음에 관해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이 세분의 대화 중에서 죽음은 마지막 결론으로 인간이 변화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반드시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사람답게 살도록 이끌려고 했던 모세와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받아 전했던 엘리야 예언자, 그리고 법과 말씀을 삶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던 예수님, 이렇게 세분은 정치, 경제, 사회적 모든 여건으로부터 변화되어야할 인간 조건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하면서 결국 인간은 변화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조차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은 죽음의 굴레인 이기적인 속성 때문에 늘 잘못된 변화를 겪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모든 인간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좋은 것을 보면 자기만의 것으로 오래 간직하고 싶어하고, 좋은 장소를 보면 머물러 있고 싶어하며, 육신과 마음의 평온함에 늘 안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변화를 겪게 되지만 그 변화는 모두가 이기적인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변화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게 됩니다. 변화되고자 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속성에 따라 기준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의 생각도, 어떤 사물도 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심 없는 마음의 원천이며, 절대적인 내어줌의 존재이신 사랑의 하느님만이 그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아타나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참된 변화란 자신의 내면안에서 이기적이고 사심이 깃든 마음에서 벗어나 타인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마음과 이타적인 행동이 드러날 때 가능합니다. 이러한 마음과 행동은 자신이 변화될 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과 주변의 상황까지도 변화를 시킬 수 있습니다. 참된 변화를 거부하고, 참된 변화의 기준조차 잃어버리고 안주하기만을 바라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모든 인간들에게 이제 참된 변화의 기준이 주어집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9,35)
참된 변화는 예수님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강하고 옳고, 자기 중심적이고 경제, 물질 돈의 중심으로 살아갈 때는 쉽사리 참 변화는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지배와 복종이라는 변화만 있습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갑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에게 나 아닌 요소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길들여지는 대로 나의 기준대로 사는 한 변화는 있을 수 없고, 새로운 경험이나, 체험도 없고, 성장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삶은 늘 불만족뿐입니다. 나의 편리대로 나의 위주로가 아니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눈이고 우리에게 변화의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우리가 쫓아가야 할 참 변화의 길이며, 이 길을 우리가 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 계시는 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충실히 듣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