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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 독서(창세 15,5-12.17-18)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주시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로 묘사되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이 되실 것이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느님 이외에 아무도 신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계약을 맺는데 상징적인 의미로 계약서를 씁니다. 그 계약서는 다름이 아니라 동물을 잡아서 반으로 갈라놓고 계약 당사자들이 그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계약을 어기는 쪽은 이 동물들과 똑같은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계약 방법을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그대로 사용하고, 탈출기에서 다시 한 번(탈출 13,21) 계약을 맺으시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그 송아지처럼 만들어버리겠다.”(예레 34,18)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제2 독서(필리 3,17-4,1)에서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를 통해 맺어진 새 계약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새 계약의 계약서입니다. 수 없이 계약을 어겨온 인간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마치 옛 계약의 계약 내용처럼, 갈라진 동물의 신세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셔야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모습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다고(이사 53,7)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이들이 율법을 “자기네 배”라고 하면서 하느님처럼 여긴다고 조롱하며, 할례를 “자기네 수치”인데도 영광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새 계약의 규정을 어기는 잘못된 행동을 질책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과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하늘의 시민처럼, 그리고 새 계약의 당사자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9,28s-36)은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에 관한 것인데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원로 일흔 명을 데리고 주님께 올라갔던(탈출 24,1) 이야기와 모세가 빛나는 얼굴로 산에서 내려온 이야기(탈출 34,29-35)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와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떠나셔야 하는 새로운 탈출 사건으로서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루카 9,22)은 새로운 시작(부활)을 뜻하는 여드레쯤 뒤에(9,28)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뒤에 혼자 남으셨습니다(9,36). 루카는 마르코복음과는 달리 베드로 다음에 항상 요한을 부르고, 그 뒤에 야고보 사도를 부릅니다(루카 8,51; 9,28; 22,8). 기도하시면서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이는 상태로 변화되신 예수님이 인간이었다가 하느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 스스로 변화되실 수 있는 분이시지 모세처럼 하느님께서 변화시켜 주셔야만 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는 예수님(구세주)과 제자들(구원될 사람들)의 관계가 변화되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나누셨던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당신께서 걸어가셔야 할 길, 예루살렘에 가셔서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말씀을 들어서 당신께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고 합니다(루카 24,27). 제자들이 잠에 빠졌었다가 깨어났다는 것은 찬란한 “빛을 겉옷처럼 두르셨다.”(시편 104,2)는 것과 예수님의 모습으로 인해 눈이 멀었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개종이야기(사도 9,8)와 통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서 사람이 제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실 때 인간이 잠시라도 예수님의 영광을 빼앗은 것으로 보이나 즉시 부활로 말미암아 그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에 싸여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하여, 즉 구원을 위한 새로운 탈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즈음에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처럼(루카 5,5) 즉시 예수님을 “두목님”(9,33)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더 많이 즐기고 싶었는지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만 사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모두가 초막이 필요하지 않았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산꼭대기에서 초막절 축제(여덟째 날)를 지내고 싶었나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되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되었듯이(탈출 13,21-22), 그리고 광야에서 구름이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듯이(탈출 33,9-10; 40,38)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다는 것은 “귀를 기울여라! 하느님께서 오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타나심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겁이 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화의 의미는 우선 하느님께서 찬란하게 보이시도록 활동하신다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말씀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잘 이해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함께 계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에 의해 “선택된 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이므로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나 오늘 복음의 거룩한 변화에서도 제자들에게 향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신명 18,15 참조) 순명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거룩한 변화의 마지막 현상은 하느님의 목소리와 더불어 홀로 남아계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또 다시 하느님 아버지의 침묵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아무도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실 때까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삶은 영광으로 계속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심(31절)은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혼자서 겪어내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께서 짐승을 잡아 갈라놓고 지나가시면서 맺으신 계약은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새롭게 맺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계약을 맺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었음을 말씀해주십니다. 계약을 어긴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입니다. 인간이 계속해서 계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계약을 어기신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책임을 지시고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실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예수님의 죽음, 즉 새로운 계약은 우리를 하늘의 시민으로 변화시켜주시는 것이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께 순종할 때에만 계약이 유효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강론] 사순 2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03.04
2007. 3. 4. 오전 8: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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