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1사물 26,2.7-9.12-13.22-23)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이 충분히 사울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는데
두 번째로 살려주는 내용입니다(1사무 24,1-23 참조).
사울은 하느님께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명분으로
가져오지 말았어야 할 가장 좋은 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가져왔고(1사무 15,10-31 참조),
질투의 대상이었던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명목으로
놉의 사제들을 죽였기 때문에(1사무 22,6-19)
하느님의 미움을 샀고,
급기야는 사무엘을 통하여(1사무 28,17)
주님께서는 이미 사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빼앗아 다윗에게 넘겨주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울이 삼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데리고 지프 광야로 사울을 잡으러 왔으나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셨기 때문에
사울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에 다윗은 사울의 창과 물병을 빼앗아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무기도 물도 다 빼앗았다면
그야말로 무장을 다 해제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처치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왕이기 때문에
다윗은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느님께 아룁니다.
보복이란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주시는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에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1코린 15,45-4)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관한 중요하고 긴 가르침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부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육체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셨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죽은 뒤에는 영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말해줍니다.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한 은총임을 말해줍니다.
은총을 주시는 것도 하느님의 몫이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6,27-38)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며,
우리의 한 쪽 뺨을 때리는 이들에게 어떻게 다른 쪽 뺨을 대주란 말인가?
그리스도를 따르기가 이렇게 어렵다면 누가 따르겠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27a: ①서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b-28: ②원수에 대한 사랑)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29-30: ③보복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31: ④황금률)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32-34: ⑤죄인들과 비교)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35: ⑥그리스도인의 차별화된 표징)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 ⑦자비)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37a-b: ⑧심판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37c-38b: ⑨주어라)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c: ⑩되질함)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②“원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말씀과 ③“보복하지 마라”는 말씀에다가
④“황금률”을 첨부한 것입니다.
둘째는, 초대교회의 달라진 상황을 생각하면서
루카복음사가가 이 황금률과 대비되는 예수님의 ⑦“자비”의 말씀 앞에다
⑤“죄인들과의 비교”와 ⑥“그리스도인의 차별화된 표징”(35)을 붙여놓으면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부분과 둘째 부분의 내용도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②“원수에 대한 사랑”에서
네 가지 긍정적 명령어(사랑하라, 잘해주어라, 축복하라, 기도하라)와
⑧“심판하지 마라”의 두 가지 부정적 명령어(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가
대조를 이룹니다.
또한
③“보복하지 마라”의 세 가지 긍정적 실천사항(뺨을 내밀고, 속옷을 주고, 달라면 주고)과
⑤“죄인들과 비교”에서 죄인들도 한다는 세 가지 실천사항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함,
자기에게 잘해주는 이들에게 잘해주고,
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 꾸어주고)과
⑥“그리스도인의 차별화된 표징”의
세 가지 실천사항(잘해 주고,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⑥“그리스도인의 차별화된 표징”의 받을 상과
⑨“주어라”에서 넘치도록 후하게 받을 선물이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⑩“되질을 하는” 대로 받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원수에 대한 사랑이 두 번씩(27b; 35) 반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27b)와 초대교회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말해줍니다(35).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보다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박해하던 유다인들의 숫자도 줄었으며,
사회적 여건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비난을 하는 정도로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에게도 잘해 줄 수 있고(27b),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줄 수 있게 되었다는(35a) 것입니다.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삶의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웃들에 대한 사랑,
같은 민족들에 대한 정의,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한 미움과 전쟁.
유다인들은 같은 민족과 자기 땅에 정착한 외국인들에게는 사랑과 정의로 대하고,
다른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은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원수들과,
너희를 미워하며 쫓아다니던 자들 위에 이 모든 저주를 내리실 것이다.”(신명 30,7)라는
율법의 말씀을 뒤엎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조차 정말 원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복음은 유다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뺨을 때리는 사람들,
밤을 지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겉옷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
무조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법정에서 재판관은 피고의 속옷을 빼앗을 권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과 낮의 온도차이가 많은 곳이므로 밤을 지내기 위해 정작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가져가는 이에게 속옷까지 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박해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을 위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란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이렇듯 강조된 것입니다.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증거자들은
이런 아픔을 견뎌내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간직했고, 우리에게도 전해준 것입니다.
2세기의 교부들과 특별히 성 유스티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원수에 대한 사랑의 가르침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세기의 유다인 철학자는
유다인의 전통에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정의의 개념만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은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5-37)의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교회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웃사랑에 대한 논쟁이 심각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원수에 대한 입장이 매우 다양했었고,
실제와 신앙에서 말하는 것도 달랐기 때문에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많은 학자들이 전쟁과 결부시켜 해석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을 했습니다만
오늘날의 상황은 처음으로 복음이 선포되던 상황과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원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늘 있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31)라는
황금률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는
자비의 실천은 정말 우리가 실현해야 할 이상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제1 독서의 다윗처럼
보복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사람의 모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단순한 이론이나 단순한 윤리적 이상향이 아니라
당신을 닮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삶의 원칙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기 위한 것이고,
죽은 것처럼 살지 않기 위한 것이며,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것이며,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기 전에 먼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황금률을 잘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그
대로 남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은 듯합니다.
또한
우리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자비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 저자도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도다.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시도다.”라고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니게 된 우리는
하늘에 속한 것이므로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께서 실천하셨던 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007.02.17 /[강론] 연중 7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 2. 18. 오전 10: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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