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 좋은 '술' 빚기
요즘 학교 현장에서 뜨는 '술중의 술'이 있는데, 바로 '논술'이다. 학교에서는 이 술을 받아 들고는 어떤 맛인지 몰라 곤혹스런 표정이다. 게다가 그 술이 마침 대입에 쓰인다니 맛이 좋을 리가 없다. 방학인데도 교사들은 이 술 제조법을 터득하느라 바쁘고,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들이 빚은 술 맛을 평가할 줄 몰라 당황한다. 학문 중 학문이라는 '철학'을 교육과정에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나라에서 갑자기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지식 통합을 요구하는 논술을 내놓고 술맛이 나게 하라니 억지에 가깝다.
대안학교 학생들은 생각과 경험을 많이 해선지 놀라운 대답이 많다. 한 예로 철학시간에 "애들아, 중학교에서는 철학이란 과목이 없는데, 왜 여기에선 철학시간이 있는 거지?"하고 질문을 던지니, 한 학생이 나서서 "중학생들은 철이 없어 어리잖아요. 고등학생 정도가 돼야 아는 것도 많아지고 배움도 복잡해지고 앎의 폭이 갑자기 커지잖아요. '도대체, 왜요?'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고 지식에 대한 의문을 곱씹고 그 해답을 얻으려니 그런 것이 아닌가요?"라고 답한다. 사실 대부분 학생들은 지식을 습득하면서도 '도대체' '왜'라는 사고를 할 겨를이 없는데, 이런 답변을 들려주는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미 논술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동안 학생들에게서 "여긴 대안학교인데, 신부님은 왜 우릴 간섭하시지요?"하는 말을 자주 들은 적이 있다. 학생들은 '자유'의 의미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해석했고, 아무런 생각 없이 학교를 떠나 밖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나는 그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를 더 성숙한 지식으로 받아들여 마음 밭에 자리를 잡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생각 속에서 자란 지식은 성숙해 갔고, 올바른 행동을 이끌어내는 '자유'로 성장해갔다. 이들이 '자유'라는 주제로 빚은 술은 그 맛이 분명히 좋을 것 같다.
요즘 학교현장에는 논술 책이 나돌고 그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암기식 논술공부로는 좋은 논술이 나올 수가 없다. 지식이 명제적 지식이 되도록 하기위해 합리적 사고뿐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설득력과 당위성을 지닌 성숙한 지식으로 재구성될 때 훌륭한 논술이 빚어질 수 있다. 성숙한 지식은 철학을 통해 만들어진다. 철학을 바탕으로 교육할 때 학생들은 술중의 술, 논술을 맛좋은 술로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준비가 돼 있지 않는데 논술이라니 학생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바라건대, 지식을 먹기만 하지 말고 숙성된 지식이 되도록 되새김하는 묵상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한다.
▒ 윤병훈 신부(청주교구 양업고 교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