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예레 17,5-8)는
우리가 늘 그리워하는 축복과 행복은
진실한 믿음과 희망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달竄?수 있음을 지혜문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을 믿거나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버려진 땅에 살려는 것이고 주님만을
믿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약속된 축복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보이는 것과 순간적인 것에만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될 때에는 저주가 찾아올 것이고,
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주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가지면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2 독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탁월한 가르침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신 맏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이고(탈출 20,16; 신명 19,18),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은 바탕도 목적도 없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은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6,17.2-26)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말해주는 구약의 표현(산에서 내려가)과 함께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는 종말론적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
제자들이 모아놓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사방에서 모여든 군중들(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나타납니다.
교회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확산되어 가는 교회 안에서 교차되는 행복과 불행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줍니다.
행복과 저주에 관한 표현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학양식에서 아주 흔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1; 잠언 8,32-36; 집회 25,7-11).
예루살렘의 번영과 안녕을 그리워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행복의 척도로 말하고,
예루살렘을 저주하거나 파괴하는 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토빗 13,12-14).
오늘 복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선언은
먼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명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29,18-19; 40,29-31 참조)는
말씀을 전제하고 종말론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6,20.24) 언급이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들과
물질적인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은
첫째로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유함이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단절을 가져다주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그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참조 탈출 20,2-6 참조)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면
모두 정의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므로
지금 가난하게 사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부자이기 때문에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경배하는 것과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배부름(6,21a.25a)에 대한 구원적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배부름이란 하느님의 선물로 인한 풍요로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던 빵에 대한 향수(탈출 16,3-8 참조)를 말합니다.
모두가 구원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정작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매우 적음을 말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의 개념에 따르면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행복이, 구원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이 주어질 것임을 말합니다.
우는 이들과 웃는 이들(6,21b.25b)은 바빌론 유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며(이사 25,8),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에게 위로의 품에 안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크게 기뻐하리라고 합니다(이사 66,10-11).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행복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제자들이 겪을 박해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박해가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된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행복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은
구약성경,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사상과
탈출기에서 나타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도 언급했던(루카 1,52-53)
예수님의 사명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선포해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요약해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말 대신에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어 정도가 아니라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말이 되었듯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복음에 비추어서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웰빙 음식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신 음식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차버리고,
더 맛있게 만든다고,
더 보기 좋게 만든다고 많을 것들을 첨가하고,
섞어놓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기 좋았고, 먹기 좋았던 음식들이 결국은 하나씩 둘씩 먹지 말아야 할 음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얄팍한 상술에 의한
“더 좋게, 더 맛있게”라는 구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그리고 느껴지는 것에 매달리려고 합니까?
이런 현상은 단순히 먹거리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순간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나머지
잘못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듣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느님의 영역을 넘나들려고 하다가 불행을 끌어들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저자(시편 1; 118 참조)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들 가운데 악인들의 삶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고,
의인들의 삶은 영원히 시들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이르리라고 강조합니다.
악인들의 행복은 곧 불행이 될 것이고,
악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는 이들의 불행은 곧 행복으로 바뀔 것임을 노래합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믿고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의로운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의 말씀이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들어라.
행복하여라,
내 길을 따르는 이들!
내 교훈을 들어 지혜로워지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행복하여라,
내 말을 듣는 사람! 날마다 내 집 문을 살피고 내 대문 기둥을 지키는 사람!
나를 얻는 이는 생명을 얻고 주님에게서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나를 놓치는 자는 제 목숨을 해치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죽음을 사랑한다.”(잠언 8,32-36)
우리가 늘 그리워하는 축복과 행복은
진실한 믿음과 희망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달竄?수 있음을 지혜문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을 믿거나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버려진 땅에 살려는 것이고 주님만을
믿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약속된 축복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보이는 것과 순간적인 것에만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될 때에는 저주가 찾아올 것이고,
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주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가지면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2 독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탁월한 가르침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신 맏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이고(탈출 20,16; 신명 19,18),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은 바탕도 목적도 없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은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6,17.2-26)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말해주는 구약의 표현(산에서 내려가)과 함께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는 종말론적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
제자들이 모아놓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사방에서 모여든 군중들(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나타납니다.
교회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확산되어 가는 교회 안에서 교차되는 행복과 불행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줍니다.
행복과 저주에 관한 표현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학양식에서 아주 흔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1; 잠언 8,32-36; 집회 25,7-11).
예루살렘의 번영과 안녕을 그리워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행복의 척도로 말하고,
예루살렘을 저주하거나 파괴하는 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토빗 13,12-14).
오늘 복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선언은
먼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명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29,18-19; 40,29-31 참조)는
말씀을 전제하고 종말론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6,20.24) 언급이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들과
물질적인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은
첫째로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유함이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단절을 가져다주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그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참조 탈출 20,2-6 참조)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면
모두 정의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므로
지금 가난하게 사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부자이기 때문에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경배하는 것과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배부름(6,21a.25a)에 대한 구원적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배부름이란 하느님의 선물로 인한 풍요로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던 빵에 대한 향수(탈출 16,3-8 참조)를 말합니다.
모두가 구원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정작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매우 적음을 말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의 개념에 따르면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행복이, 구원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이 주어질 것임을 말합니다.
우는 이들과 웃는 이들(6,21b.25b)은 바빌론 유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며(이사 25,8),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에게 위로의 품에 안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크게 기뻐하리라고 합니다(이사 66,10-11).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행복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제자들이 겪을 박해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박해가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된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행복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은
구약성경,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사상과
탈출기에서 나타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도 언급했던(루카 1,52-53)
예수님의 사명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선포해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요약해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말 대신에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어 정도가 아니라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말이 되었듯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복음에 비추어서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웰빙 음식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신 음식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차버리고,
더 맛있게 만든다고,
더 보기 좋게 만든다고 많을 것들을 첨가하고,
섞어놓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기 좋았고, 먹기 좋았던 음식들이 결국은 하나씩 둘씩 먹지 말아야 할 음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얄팍한 상술에 의한
“더 좋게, 더 맛있게”라는 구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그리고 느껴지는 것에 매달리려고 합니까?
이런 현상은 단순히 먹거리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순간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나머지
잘못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듣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느님의 영역을 넘나들려고 하다가 불행을 끌어들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저자(시편 1; 118 참조)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들 가운데 악인들의 삶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고,
의인들의 삶은 영원히 시들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이르리라고 강조합니다.
악인들의 행복은 곧 불행이 될 것이고,
악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는 이들의 불행은 곧 행복으로 바뀔 것임을 노래합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믿고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의로운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의 말씀이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들어라.
행복하여라,
내 길을 따르는 이들!
내 교훈을 들어 지혜로워지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행복하여라,
내 말을 듣는 사람! 날마다 내 집 문을 살피고 내 대문 기둥을 지키는 사람!
나를 얻는 이는 생명을 얻고 주님에게서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나를 놓치는 자는 제 목숨을 해치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죽음을 사랑한다.”(잠언 8,32-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