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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선언 -마산교구 신은근 신부- 누구든 조금씩 행복에 대해선 알고 있다. 행복이 무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현은 안해도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느낌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확신에는 망설인다. 행복해 보이건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행복하다고 말하면 진정 날라가 버리는 것일까. 행복은 은총이다. 주님께서 주시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겸손으로 대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신앙인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본질은 주님의 선물이라 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행복은 불안으로 바뀐다. 그러니 참 행복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이 세상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굶주리며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세상에선 아무도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원인이 하느님 때문이라면 다르다. 그런 삶을 산다면 반드시 함께 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면 누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갈수록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지향한다. 물질이 없으면 죽는 줄 안다. 국가 전체가 경제대국을 지향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 말씀은 더 깊은 묵상을 요구한다. 진정 필요한 말씀이지만 잘못 이해하면 가난의 행복을 외치는 궤변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데 있다고 했다. 이것이 행복의 열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가. 우선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야만 채워주신다. 가난에 대칭되는 표현은 부유함이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소유는 언제나 또 다른 소유를 부른다. 부자가 자꾸만 부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든 재물을 소유하면 더 많은 재물을 갖고 싶어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나중엔 사람이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해 버린다.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은 이 끝없는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자세를 말한다. 소유의 욕망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자세를 말한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될 때 물질 앞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구별을 물질의 소유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진정한 부자는 소유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언제든지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분의 힘을 느낀다. 누구든 절제와 자유를 갖추면 행복해진다. 그런 자세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찌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어찌 세상이 그에게 아름다움을 주지 않겠는가. 삶이 어찌 그에게 무섭고 두렵겠는가. 그는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란 말이 어울린다. 하느님의 힘이, 하느님의 세력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부자는 물질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소유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닫도록 하자. |
2007.02.10 [강론] 행복 선언[신은근신부님]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2007. 2. 10. 오후 12: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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