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길, 행복 버리기 불행 선택하기
-서울대교구 박동호 신부-
우리는 눈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행복을 가늠하는데 익숙합니다. 부자가 되면,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으면, 그 밖에도 눈으로 측량할 수 있는 많은 조건들을 충족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가난은 불행일 뿐이며,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다니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며, 명예를 얻지 못하면 주눅이 드는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부와 자원의 공정한 분배, 인간 그 자체의 존엄함, 품위 있는 인격, 순수한 명예 등의 고상한 가치는 단순히 말로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의 고발처럼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들의 장난에 우리가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묻게 됩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측량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은 어쩔수 없이 서열을 만들게 됩니다. 서열의 앞뒤자리가 행복과 불행을 가름하게 되고, 다수의 행복을 만들기보다 그 소수의 묶음에 들어가려 애쓴다면, 그것은 결코 현명한 자세도 성숙한 태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모두가 그렇게 외적인 조건을 기준삼아 행복을 놓고 경쟁해야만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이들의 행복이 강화, 지속될 수 있다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이들에게 오늘 복음의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웃기는 소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 눈에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뿐이며,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좋은 말을 듣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낙오자의 자기 위로와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죽 못났으면 가난하고, 오죽 무능하면 굶주리고, 오죽 변변치 못하면 울고, 오죽 한심하면 모욕을 당하겠느냐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다 하신 것은 그들을 위로하며 달래거나,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며 현실의 고통을 무마하기 위한 속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겪는 “큰 무리를 이루고 있는 백성”에게 삶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어야 함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소수만의 행복을 지양하고 다수의 행복을 지향한다면 함께 살 길을 찾으라는 촉구입니다. 당신이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과 빵과 당신의 생명을 나누셨듯이,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고 따돌림 받은 이를 보듬어 주셨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살아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불행한 길을 걸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온백성의 큰무리 위에 올라서려 하지 말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은 세상 한복판에서 참행복을 위해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 성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하지 않은 채 자기 몸집 치장하고 불리기에 온 힘을 다한다면, 그것은 현세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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