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1 주일
2006. 11. 5.
중계본동.
신명 6, 2-6.
히브 7, 23-28.
마르 14, 28ㄱㄷ-34.
시기 질투일 수 있지만, 누구나 뛰어난 사람을 보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시기질투 모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뛰어난 언변과 사랑의 마음, 당시 기득권들과는 다른 권능, 이러한 모습은 바라보는 이들도 하여금 매력적인 요소로 등장하기도 했고, 자신들이 아는 것과 비교해 젊은 선생의 세계를 알고 싶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전에 등장하는 이들은 예수를 떠보려하거나 시비조의 접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응 방식도 공격적입니다. 그들이 질문할 때 질문으로 응수를 하시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등장하는 율법학자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시죠. 그것은 그의 접근은 호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젊은 스승에게 한 수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존경과 충실. 이것이 잘 어우러져 오늘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노라면 아름답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이 율법학자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 사두가이들로 이어지는 예수님과의 논쟁을 지켜보았습니다. 날이 선 질문을 쏘아대며 예수께 다가서지만, 이내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돌아서게 됩니다. 그것은 지켜보고 있었고, 허전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분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 12, 28)
사람들은 이름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싶어합니다. 계명에 대한 가르침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계명은 영원한 생명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율법학자는 자신의 체면을 버려두고 이 이름난 선생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견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온 마음, 온 목숨, 온 정신, 온 힘! 예수께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 24 시간 중 1시간, 2시간 이런 개념으로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시간을 생각합니다. 나 오늘 주님을 위해서 1시간 바쳤어, 2시간 바쳤어, 난 더 바쳤는데…. 그러나 그분께서 내게 약속하는 것이 영원함이라면(그 영원함이 우리의 시간 개념을 뛰어넘어 오로지 나를 향한 사랑으로 천년도 하루 같은 달콤함이라면) 나 역시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리며 그 분의 함께 하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마음-내 영적인 삶-과, 목숨-내 느낌, 감정, 욕구들-과, 정신-내 오성과 지성-과, 힘-내가 행할 수 있는 힘과 역량-을 다 바쳐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뭐 특이한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신경인 (신명기 6, 4-5)의 내용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랍비들도 가르치는 것이었죠.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완되어져야 하는 것 아니 본래 그래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이웃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늘 믿음으로 구원받음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멘' 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믿음의 구원이 늘 행동으로 완성됨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이 널 구원했지만, '가라' 가서 네 믿음을 보이라고 하셨죠. 우리는 흔히 옆 동네와 믿음으로의 구원이냐 행위로의 구원이냐는 문제로 비교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행위와 구별될 수 있단 말입니까? 언제 예수께서 믿음과 행위를 구별하셨습니다. 그분이 믿음의 인간이요, 믿음의 하느님이셨고, 우리에게도 역시 그것으로 초대를 하고 계시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만약 믿음만 강조하면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만 알아들은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울부짖어도 그가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나무에 달려 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 그것은 잘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다녀올 곳이 있어서 택시를 탔습니다. 그 차 안에서 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종교 얘기가 나왔습니다. 국민일보가 어느 교단 아들의 것이니 어느 병원이 어느 교단의 것이니 하면서, 그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이 많으니 운영하는 데에도 돈 걱정하지 않고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왜곡된 부분도 있는 견해였지만, 그 얘길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우들이 헌금을 하는 것이 그 교회만을 위해 쓰여진다면 과연 그것은 올바른 헌금이며 올바른 쓰임인가? 봉헌이란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고, 그 주님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고,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이라고 했건만, 지금 우리는 그 헌금을-헌금을 정성껏 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어디에 쓰고 있는가? 주로 우리 아닌가? 우리 단체, 우리 교회, 우리 재단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주님의 이름으로 봉헌되고 있는 것이 큰 건물을 짓는 데에 주로 쓰여지고 그것을 운영하고 있는 데에 쓰여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으리으리한 교회의 건물을 보면서 그런 대형교회는 과연 주님의 교회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여기에서의 교회란 두말할 것도 없이 신교와 구교를 망라하는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교가 어디 이런 것에서 자유로운 적이 있었는가? 심지어 나마저도)
이웃 사랑.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 가까운 곳에,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이 율법학자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제도권에 있으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라 할지라도 무엇인가 진짜를 추구하던 이 율법학자는 자신도 모르게 젖어있던 기득권을 버리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어 기득권에 머물기만 한 그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탁 치며 예수님께 동조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과연 옳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마르 12, 32-33)
무릎만 쳤겠습니까? 박수를 보내며, 탄성을 지르며, 맞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라고 연신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도 말씀을 드리죠. 이것은 그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 이것은 마치도 그가 속해 있던 기득권의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나옵니다. 이제 진리를 발견했기에 박차고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의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응답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와 이야기만 해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거늘, 이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견해에 박수를 보낼뿐더러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한 가치를 끌어 내리는 듯한 발언을 하다니. 그의 율법학자로서의 삶을 끝난 것일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생제물이나 번제물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나의 온 삶이 배어있는 제물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제물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바치고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다.)
예수님과 이 율법학자의 대화를 보면서 참, '살아있는 만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께 물어보고, 답변하시고, 거기에 다시 자신의 말씀을 드리고…. 이것이 만남입니다. 사제(예수)가 강론을 하면 맞장구를 치듯이 응답하고, 다시 그것에 대해 응답하고, 그 응답에 다시 맞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관계.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전례입니다.(아멘이라고 하거나, 고개라도 끄덕이면서 사제의 말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 것, 이 얼마나 성경적인가? 도대체 듣는지 듣지 않는지 경직된 모습은 설교를 하는 이로 하여금 맥이 풀리게 한다. 예수님과 군중(지금으로 보면 교우)들의 만남이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은 무미건조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계응의 관계였다. 말할 때마다 연신 아멘을 외쳐대는 저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필수는 아니라도 그것이 설교를 하는 이에게 힘이 되고 신명나게 한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것은 순환이다. 그렇게 만들었기에 교우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렇게 굳게 다물고 있기에 사제는 읽듯이 끝낸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 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슬기롭다' 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여기 단 한번 쓰이는 말인데, 그의 말하는 품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예수께서 인정해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답변으로 말미암아서 여타의 질문은 없게 되는데, 그동안 달려들었던 다른 이들의 물음이나 우리의 궁금증은 이것으로 다 풀렸으리라는 것이 마르코 복음사가의 견해입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율법학자의 대화 속에 우리가 들어야할 가르침이 완성되어졌다 이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끝 말씀은 '너는 하느님나라에 있다'라고 하면 좋았을 것을, 예수께서는 그렇게 훌륭한 그를 보시고, 멀리 있지 않다 즉 가까이 있다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그의 훌륭함은 예수께서는 감탄할만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죠. 네가 입으로 고백한 것은 나무랄 것이 없지만, 이제 가서 네가 고백한 것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삶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 사랑에 대해 물으실 때, 그 물음 과 답변 뒤에 늘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 15.16.17)고 말씀하시는 것도 역시 실천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죠.
A.D.138년 아테네 출신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가 로마황제에게 보내는 호교서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를 보면 그를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그 나그네가 마치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서 온갖 정성을 다해 묻어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나 묶인 이들을 보살펴 줍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필요한 음식을 주려고 이틀이나 사흘 동안 단식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편지로 써서 황제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의 내 삶을 누군가가 쓴다면? 이웃집에 있는 사람이 내 삶을 편지로 쓴다면 어떻게 쓰여지게 될까요?
'우리 옆집의 교우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주일이면 꼬박꼬박 성당에 다녀오는데, 다녀오는 표정이 그리 밝지 않고, 다녀와서 툭하면 싸웁니다. 도무지 이웃을 사랑함이 없고, 가족끼리도 자주 다투는 듯합니다.'
뭐 이런 식의 편지가 나의 삶에 대한 편지여서는 안 되겠죠.
'우리 옆집 교우 그리스도인은 성당에 다녀오면 늘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싱글벙글입니다. 늘 '사랑합니다'를 외치고, 그렇게 사랑합니다. 가족들에게는 물론 이웃에게도 사랑의 메신저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보면 꼭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면 도대체 예수가 궁금합니다.'
오늘 누군가가 나에 대해 편지를 쓴다면 어떻게 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