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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
참 사랑은 구체적 행동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마르 12, 31)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오늘 복음에서 율법과 계명에 대해 나오고 있는데, 율법과 계명에 대해 우리 신자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자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은 죄가 되는가', 혹은 '이것은 계명에 어긋나는가' 등 이러한 생각들이 가슴과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평화방송의 신앙상담 시간을 듣다보면 이러한 질문들이 가장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명과 율법이 그만큼 우리 신자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어떤 율법학자가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게명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율법은 613가지로 세분화되어 있었고 이 모든 것을 잘 지키는 것이 유대인의 큰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것들을 지켜 나가면서 율법에만 신경 쓰다보니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으로 보셨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기적과 행동 그리고 가르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레위 19, 18), 이 두 사랑이 모든 계명의 요약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성서의 근본 사상을 파악하고자 성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어떤 것인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약성서의 각 귀절들을 각각 카드로 만들어 분류해 보았는데 그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사랑'이라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용서'에 관한 말이였다고 합니다. 과연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씌여졌다는 것이 이 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장식하였던 지존파 살인집단의 경우나 성수대교의 붕괴사건, 그리고 충주호의 관광배 침몰사건 등, 일련의 가슴아픈 사고들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무모한 인명을 무참하게 살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가고 사용할 공공의 다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침몰할지도 모르는데 정원초과하여 사람을 태울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바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일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드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한 표현방법으로는 우리가 전례 행위 안에서 드리는 인간의 행동과 말이 있을 것입니다. 즉 예배행위, 미사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고백, 찬미와 찬송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경건한 몸동작 등을 통해 표현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외부 형식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되며, 마음으로부터 진실된 제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자신을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마 12, 1) 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이 신령한 집을 짓는데 산 돌이 되고,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십시오' (1 베드 2, 4-5) 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말씀은 우리 크리스찬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속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힘껏 봉사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속에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이 들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야고버 사도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억눌린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이웃인 나그네를 잘 대접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얻었는데 그는 천사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웃은 하느님의 천사이거나 바로 하느님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들으며, 이러한 사랑이 우리들의 구체적인 모습속에서 진실로 드러나는 사람이 되도록 결심하며 필요한 은혜를 이 미사 중에 간구합시다. 아멘. (김웅태 신부) |
참 사랑은 구체적 행동에서
2006. 11. 6. 오전 1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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