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들의 세력이 강한 가나안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했던 필수적이며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율법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 율법대로 살아야만 하는데
특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 원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 독서의 마지막 부분(6,4-9)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매일의 기도에서 외쳐야만 했던 중요한 내용입니다.
오늘 제2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원한 사제직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늘 살아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빌어주신다고 강조합니다.
지난 주 제2 독서에서와 같이
율법에 의한 구약의 대사제들과
하느님에 의하여 세워진 대사제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대사제는
날마다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신 신약의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단 한 번 봉헌하신 제사로 충분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든 이들의 죄를 다 씻어주실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워 붙잡으려는 수석사제들,
율법학자들과 원로들(11,27),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12,13),
그리고 사두가이들(12,18)까지
이스라엘에 있던 모든 조직들이 벌떼처럼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에 관하여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논쟁을 듣고 있던(마르 12,18-27)
율법학자 한 사람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마태 5,17)
가장 기본적이면서 원초적인 율법의 조항이 뭐냐고 묻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삶의 모습을 돌이켜본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마르 12,35.38).
모두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율법학자야 말로
자기 신분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 사두가이, 그리고 헤로데 당원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었을 터인데
과감하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12,38-40)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과 나눈
부활에 대한 논쟁이 이 율법학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첫 계명을 읽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된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아 들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라는
이 첫 번째 계명을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외쳐야만 했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유다인 남자라면 모를 리가 없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 제1 독서(신명 6,4-5)의 내용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첨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께 “훌륭하십니다. 스승님”이라고 고백한 슬기로운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말씀하십니다.
제1 독서(신명 6,4-6)에서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첨부해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신을 다하라는 말을 첨부하시면서
하느님께 대한 앎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마음은 갈라지지 않음을,
생각은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정신은 문자의 뜻을 훨씬 뛰어넘어 영적으로 높은 차원의 지혜와 깨달음을,
그리고
힘은 중단하지 않는 추진력이 요구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에 이어서 이웃사랑을 첨부하신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행동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모든 선의 시작이고,
이웃사랑은 다른 사람을 정의롭게 대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단편, 251)
또한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인 십계명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는 하느님 사랑의 세 가지 방법(마음, 목숨, 힘)을 설명하면서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라는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덧붙입니다.
율법학자의 이 응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슬기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는 이 말은
많은 것을 암시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는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워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온통 혈안이 되어 있으나
율법학자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이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마태 5,17)이
율법학자에 의해 증명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그리고 율법학자와의 논쟁에서
당당하고 권위 있게,
그리고 명쾌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듣고는 놀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이런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히브 7,28)
사랑은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히브 7,26) 예수님을 대사제로 세우십니다.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옳고 그른 것을 잘 가려내는 분별력을 가지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잘 깨닫고,
중단하지 않는 꾸준함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연중 31주일 - 방효익 신부님
2006. 11. 6. 오전 10:04:54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