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 서진영 신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당 대표직에서 시작해서 기초 단체장, 노조 위원장, 반장 등등 수많은 직위가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그 사람들의 대표직을 맡고, 그들을 대변하는 첫째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맡고 있는 직책이 바로 감투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투 중에는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 감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부탁해도 선뜻 맡기 어려운 감투도 있습니다.
우리 성당 다니는 분들은 이 말을 빨리 이해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당에도 제단체라는 이름으로 사목위원회, 레지오 마리에, 연도회, 성모회, 자모회, 제대회, 교사회 등등의 수많은 단체와 구역반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단체 중에 장이 없는 단체는 없습니다. 여기서 장 맡고 있는 분들 중에 더러는 본인이 단체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말에 “여러분의 기도에 나를 맡깁니다”라는 말씀으로 교황직에 오른 교황님 이상으로 걱정과 근심에 몸을 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오고야 말 것이 드디어 왔다’라고 담담히 받아들인 분도 있을 것이고, 절대 못한다고 뒤로 넘어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그래서 인정 받던 내가 어느날 장 한번 맡아서 그전에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에게 전화하고 사정하고 매달립니다. 누구보다 일찍와서 준비하고, 누구보다 늦게가면서 뒷정리를 해야 합니다. 사서 고생도 이만한 고생 없습니다. 이게 성당 감투입니다. 무섭습니다. 이 감투를 쓰고 고생하는 분들은 오늘 복음의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을 이해한 분들입니다. 아니 적어도 그 말대로 살려고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감투는 로비까지 해서라도 가져와야 직성이 풀리지만, 성당 감투는 그냥 줘도 안 합니다. 돈 주고라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덜컥 감투를 맡아 오면 가족들이 걱정합니다. 이제 우리 집안의 평화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러니까 너무 열심히 하지 말랬잖아!”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억지 춘향 격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게 있습니다. 인명 구조 자격증을 받으려면 얼마나 수영을 잘 하는지를 시험해 보고 자격증을 준답니다. 어설픈 구조 대원은 자신도 죽고 구하려던 사람마저 죽이기 때문입니다. 수영장에서 익사 위험에 빠진 사람은 그야 말로 수영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처지가 못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봉사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을 보고도 인명 구조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일로 인해 자격을 상실합니다. 장을 맡은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부족하다고, 그럴 처지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지만, 그래도 그분들이 적임자가 맞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이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단체장 역시도 신앙으로 그 일을 하는 한, 자신이 받아들인 예수님과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보잘 것 없지만, 그 사람은 그 일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가 어려울수록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입니다. 황금은 불 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