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함세웅 신부-
지난 주일의 복음(루가 1,1-4: 4,14-21)은 루가가 기록한 성경(루가 복음과 사도행전)가운데 제 1편의 서두로 시작해서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구약 예언서의 완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4,21-30)은, 그 구세주 예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자연적인 반발 또는 무시당하는 과정을 그려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저것으로 변명하지 않으시며, 또다시 구약의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선민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다', ‘유태인이다'하는 자연적 기원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착한 뜻'과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격언이 된 말씀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구원사와 인간사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루가가 기록한 성경의 특징은 고대 희랍의 서간체 형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 로마 제국의 고관이었던 테오필로에게 ‘기쁜 소식'을 그대로 알려 주어 그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내용입니다.
똑같은 문체의 서두가 루가복음의 제 2편인 ‘사도 행전'에 기술되어있습니다. 테오필로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입니다. 이러한 서두가 끝난 다음, 즉시 루가는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의 요한 세자에 대하여 언급하며 예수의 탄생 내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 4장 후반이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입니다. 즉 ‘기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기쁜 소식'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모양으로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인지를 말해 주려 합니다. ‘기쁜 소식'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약속되었고(창세기 3,15),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된 것입니다. (이사야 61, 1-12)
사실 창세기로부터 구약 47권의 모든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모든 역사적인 사건, 인물, 예언을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구원사의 주인공인 ‘예수' 즉 ‘메시아'를 그리기 위해서 열거된 것입니다. 그 구약의 기다림의 주인공이 이제는 실현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 주인공은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무대를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관중, 즉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기준은 이제는 더 이상 혈통적, 종족이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하느님이 사람으로 되신 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탄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의 고통이, 삶의 과정이, 인간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고 실증하기 위해서 ‘내가 걷고, 우리 모두가 걷는 이 모든 어려운 인생살이의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놀라우신 계획,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또는 ‘백 번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 모범으로 실천해주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이 진리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는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하느님, 나는 왜 가난해야 합니까? 하느님, 어찌할 수 없는 이 인간사의 부조리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왜 나는 무시와 천대를 당해야 합니까? 하느님, 사랑하는 우리들은 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또 갈라지며 그리고 죽어야만 합니까?"하는 물음표가 달린 원성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원성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 사막과 광야에서 고통받았던 이스라엘, 바빌론으로 유배갔던 이스라엘,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원성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사랑하고 뽑았던 선민 이 었습니다.
그 원성에 하느님은 해답을 주겼습니다. 예수를 보냈습니다. 그 예수는 갓난아기로 탄생되어, 우리와 똑같은 어려운 생활을 하였고, 결국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 그 예수는 우리의 모든 원성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어려움을 그대로 수락하여 이겨낼 때, 그 예수는 부활의 예수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신앙인인 나도 가끔은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 ‘이웃을 사랑해라', ‘기도를 잘 바쳐라' 등등, 웃어른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웃어른들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기도조차 바치지 않을 때, 자녀들은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로써 신앙이 무엇인지를 제 3자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신앙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론]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함세웅신부님]-4주일
2007. 1. 28. 오전 9:00:13
글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