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편지 10 [교도소에 간 박신부] /2007.01.08

2007. 1. 11. 오전 12:36:02

글자

편지

 

인터넷, 휴대전화기가 편지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나에게 편지는 바깥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다.
비단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한 달에 서 너 통의 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일부 우량수들을 제외하고는 이곳 담안에 있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 일테니까.

하루일과를 마치는 시간에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받아들곤 환한 얼굴로 서둘러
편지를 읽는 동료나, 편지를 읽고 어두운 인상을 짓는 동료들, 혹은 기다리던
편지를 받지 못해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매일 되풀
이되는 일상중의 하나이다.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편지이지만
‘편지’라는 단어는 내게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내 사물함 한쪽에는 그동안 써 놓고도 부치지 못했던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느새 서른 통이 넘어선 그 묶음 안에는 벌써 7년이나 지난 편지도 있
는데 과연 그 편지들이 전달이나 될 수 있을런지, 앞으로도 몇 통의 편지가
더 쌓여야 하는지 그런것들을 생각할 때면 아득하고, 안타깝고, 또 미안한 마
음을 억누를 길이 없다.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에게 쓴 편지들,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죄를 지어
갓 돌 지난 아이와 아내를 남겨 두고 무책임하게 이 곳에 들어왔던 나는 그때
부터 아이에게 편지를 썼지만 한번도 보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편지를 써봤자 아이가 읽을 수 없고, 이해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부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가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때가 되
었지만, 나는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처럼 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이의 모습을 희뿌연 유리벽을 통해서나마 실제로 본 건 4살때가 마지막이다.

그후 사고의 능력이 이제 막 생긴 아이에게 아버지가 감옥에 그것도 커다란
죄를 지은, 그러니까 사회적 기준으로 말하자면 흉악범이라는 걸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그 때 이후 나는 아이를 볼 수도, 편지를 부
칠 수도 없었다.

지금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어 아이의 가슴에 둘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것을 걱정하여 차라리
아빠 없는 아이의 조건을 선택했던 아내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까.

그후 아들은 열장 남짓한 사진 속에서 나이를 먹고, 키가 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물론 하루에 수도 없이 아이가 보고 싶고,
아이에게 내가 아빠라는 걸 알리고 싶고, 다른 부자(父子)들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다.

그 그리움이 너무도 커져 어찌 할 수 없을 때 나는 아이에게 부치지도 못
하는 편지를 쓴다.

마치 옆에 있는 아이에게 다정한 아빠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고, 못난 아빠로서의 미안함을 담고,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보고파
하는지 그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담은 편지를 정성스레 쓰다보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내가 쓴 편지가 꼬 전달 될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진
다. 그럴 땐 사진 속에서만 있던 아이는 어느새 내 품에 와 앉긴다.
‘아빠’ 하고 다정스레 부르며..

그렇게 사진 속에서만 나의 상상 속에서만, 나와 소통하는 반쪽 짜리 아이
지만 그 아들의 존재만으로도 내게 이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이 현실이 아득하게만 느껴지고
절망하려 할때, 나는 모진 세상 속에서 어렵게 살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며
나약해지려는 나를 붙잡는다.

사실 예전에는 그랬다. 운명이란 가혹한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한참이나
어긋나버린 내 인생을 돌아볼 때마다,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나를 낳아
준 부모님이 계셨다.

‘만약’ 이라는 가정 하에 부모님에게서 버림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 처럼
평범한 인생이 주어졌더라면, 차라리 그냥 생모를 모른 채로 살았더라면,
그런 생모가 뒤늦게 나타나 사건의 발단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불행은
겪지 않았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도 해보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겨 준
어머니를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하지만 어느날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관절염
과 멀미 때문에 면회를 가고 싶어도 못가신다는, 그래서 편지로 대신한다
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선 그간의 생각들리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자기
변명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들아 너무도 미안해서 그동안 미안하다는 말 한번 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주렴” 받침 틀린 글씨로 꾹꾹 눌러쓰신, 평생
처음 받아본 어머니의 편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놓고도 이렇게 큰 용서를 받고 살고 있는 내가 과연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할 자격이 있을런지. 부모님이 아니셨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텐데...

자식을 가져봐야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한다 했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를 버리셨을 어머니처럼 불행히도 나 역시 아들에게 내자신의 존재를 떳
떳이 드러내지 못하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되고 만
부끄럽고 초라한 아버지가 되어 비리고 말았다.

그런 아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미워하지나 않을까, 부정하지나 않
을까 불안한 마음과 조바심을 감출 길이 없다. 하지만 설혹 그렇다 하더
라도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까 한다.

이제 얼마 있으면 아들의 생일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부치치도 못하는 편지를 쓰는게 전부이지만 모든
게 나아지리라 믿으며 희망을 꿈꾸어 본다. 내 마음을 전하는 졸시를 담아
오늘도 아이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

이메일이, 문자 메시지가 대신하는 세상에
아버지는 커다란 글씨를 또박또박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씁니다.

변신 로봇, 축구공, 하다 못해 케잌이라도
다른 아버지라면 아들 생일을 위하여 생각해 보았을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못난 아버지는 선물대신 편지를 씁니다.

아들!
그 모질었던 시간들을 버티게 했던 버팀목이었음을.
내일이란 단어를 꿈꿀 수 있게 만드는 희망이었음을.
오늘 그 아들은 못난 아비의 존재를 무력하게 하며 한숨을 뺏더니
기어이 눈물까지 내놓으라 성화입니다.

가시고기 아빠는 못될지언정 평범한 아빠이기만 했더라도.
푸른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보고싶다, 아무리 써봐도 안타까움만 더해가는 가슴.
아픔, 회한 모두 행간에 묻어 버리고

아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만 넘쳐나는 편지를
아들의 생일날 아버지가 씁니다.

  - 이 글은 지금도 열심히 담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재소자의 수필입니다.-
 
                                              박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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