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오늘 제1 독서(미카 5,1-4ㄱ)를 통하여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결정적인 예언을 묵상하게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마치 임금이 없는 것처럼 살았고,
정신적 지도자가 없는 것처럼 살았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빌론에 유배를 다녀와야만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거슬러
“망하는 꼴을 우리 눈으로 지켜보자”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라(미카 4,9-14)고
전한 뒤 느닷없이
메시아가 태어날 곳으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에프라타의 땅인 베들레헴을 들춥니다.
예루살렘에 공급하던 빵(lehem) 공장이 많았던 지역(beth)이라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분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돌멩이 다섯 개로 필리스티아 장군 골리앗의 군대를 물리친,
유다 베들레헴 출신 에프랏 사람인 다윗(1사무 17,12-54)에서
메시아의 뿌리를 찾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해산하는 여인과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바빌론에서 살아남은 자들,
즉 새롭게 태어난 유다인들이 유배에서 돌아오리라는 두 가지 현상을
이사야 예언자(7,14; 9,5; 10,21-23)와 예레미아 예언자(21,16-17,22)는
“어머니”라는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어머니를 통하여 새로운 형제들을 얻게 된다는 표현 가운데에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새롭게 세워질 것이며,
하느님의 이름의 위엄을 받으신 진정한 목자가
예루살렘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이때에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고,
평화이신 목자는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을 우리는 교회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제2 독서(히브 10,5-10)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순하게 한 인간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시려는 분이 태어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메시아의 탄생이시며,
오래 전부터 예언되었던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은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에게 먹힐 빵을 만드는 공장이 많은 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단순한 약속 안에
이미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에게 먹히는 빵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신다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빵은 사람이 살기 위해 먹혀야 하는 필수적인 음식입니다.
매일 미사에서 우리들에게 먹히시는 예수님 역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빵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39-45)은
마리아가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인사말과 마리아가 불렀던 노래입니다.
교회는 두 주간에 걸쳐서(대림 2-3주간)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쉬웠는지
오늘 마리아의 방문을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부각시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이
아인카림이라는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의 동네로 가는 길이야말로
앞으로 예수님이 걸어야 할,
세례자 요한이 고쳐놓아야 할
굽은 길과 높은 골짜기와 거친 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태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요한은
이미 자신이 예언자와 선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음에 기뻐 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배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배속에서의 움직임은 미래의 사건을 예견하듯이(창세 25,22-28)
세례자 요한의 예언자와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자신의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갈 길을 가려는 것도 아니고,
사촌 언니를 만나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이런 일에서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가실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길을 떠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예수님의 사명에 마리아께서 동참하십니다.
그것도 “서둘러” 떠났다는 것은
신앙에 대한 순명과
하느님의 계획의 조화가 마리아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리아라는 여자와 예수님이라는 남자,
마리아라는 인간과 예수라는 하느님이 한 몸이 되어 구원의 길을 떠납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인사가 있었듯이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 인사말은 사랑의 징표로 변화되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성령의 복음을 썼다는 루카복음사가는
즉시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차서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찬양의 인사말에는
자신이나 아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관심은 마리아와 예수님께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즉시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하면서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지난주에 들었던 질문,
즉 군중들과 세리와 군인들이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의 대답처럼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기뻐 뛰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대답할 여유도 없이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이들에게 행복을 선포합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에프랏 사람인 다윗에게 약속해주신 구세주의 탄생이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따른 마리아의 신앙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유다 땅 베들레헴에 대한 미카 예언자의 예언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려는 이들에게는
거북스럽고 쓸데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오래전에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해서 희생 제물로 봉헌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하는 예수님의 구원의 여정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축복의 사건이지만
고통을 동반하는 이런 하느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예” 하고 동의하신 마리아의 신앙에
엘리사벳과 배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기뻐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확인시켜주는 축복의 의미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끝에 주님의 축복을 받고 성당을 떠나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등에 지고,
마리아의 겸손과 신앙을 가슴에 안고,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서둘러 돌아갑니다.
축복은 사명을 동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사명과 함께 역경도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경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내면서 엘리사벳의 외침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소리를
우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화답송을 후렴 없이 다시 한 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론] 대림 4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6. 12. 24. 오후 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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