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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대림 제 3 주간 화요일. 2006. 12. 19. 토평동.
판관 13, 2-7.24-25. 루카 1, 5-25.
성령을 강조하는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를 쓰면서 성전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복음서를 쓰게된 경위를 말하면서 시작한 복음은 이제 오늘의 말씀에서부터 복음의 끝인 24장까지 처음과 끝을 성전이라는 배경을 두고 써내려가는 것이죠. 이것을 볼 때 우리 역시 성전에서 주님을 만나며 그 안에서 성령을 체험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흠 없이 살아가는 노부부. 이들에게 소원이 있다면 자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원은 바로 성전에서 이루게 됩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겨우 한번 정도 갖게 되는 기회, 정말 운이 좋다면 두 번 정도 갖게 될 기회인 사제로 분향단에 올라 분향하는 몫.(제사장으로서 24개조가 있는 무리에 아비야조에 속한 즈가르야. 일년에 두 차레 성전에서 일주일 동안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데, 그중에서도 분향하는 등의 주된 업무는 특별히 뽑힌 사람이 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제사장이 대략 8천 명 정도 되었다고 하니 그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뽑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우리 역시 일생에 한 번도 서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자리 즉 제대에 설 수 있는 봉사를 하고 있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여기고 온 마음을 바쳐 봉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뽑힌 즈카르야는 분향을 하다가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얻고자 했던 자식에 대한 전갈을 받습니다.(이렇게 분향을 하다가 주님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분향이 바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삶을 올리는 것이니 그 믿음의 경배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리라.)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 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투덜대지 않고 끝까지 신실한 삶을 살아왔으니, 주님께서는 그가 바라는 것보다 더 큰 영광(주님을 예비하는 아들)을 안겨주는 것입니다.(우리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투덜대거나 떠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가?) 천사가 오른편에 섭니다. 이 오른편은 희망의 방향이고, 길한 방향입니다.(예수께서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는 것은 희망을 던지라는 것이고, 희망을 낚을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 우편에 달린 강도는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낙원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다) 천사가 즈카르야를 방문한 것이 불길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루카 1, 13)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통해서 천사는 즈카르야가 얻게 될 은총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그동안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신실히 해왔듯이 이 전갈에 믿음을 보였다면 그는 시련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씀에 의구심을 품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라도 그 상황이 되면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 18)
우리가 핑계를 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께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즈카르야를 보십시오. 그가 하느님의 영광을 받았음에도 의심을 하고 핑계를 대는 바람에 시련을 겪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서 주님의 대전에서 봉사하고, 주님의 뜻에 침묵으로 순종하며 응답했던 것입니다.(그가 비록 말을 못했지만, 얼마든지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이는 그 영광스러운 예식을 마친 후 나와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축복의 기도, 강복을 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늦게 나왔고, 그가 말을 못하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침묵합니다. 주님의 신비가 드러날 때까지 동참하는 것이고, 그의 아내 역시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그 신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역사의 신비함을 보게 됩니다. 즈카르야의 불신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불신앙을 통한 하느님의 역사, 그가 겪게 되는 시련을 통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를 봅니다. 하느님의 역사는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이구나. 그 기다림이 한없이 길어져도 끝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몫이구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혹 내가 믿음이 흔들려도 그래서 내게 시련이 다가온다 해도, 내 뜻과 달리 주님께서 시련을 주신다 해도 다시 일어서 주님을 신뢰한다면 더 큰 은총을 예비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구나.
즈카르야의 믿음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혜안을 청합니다. 주님의 성전을 절대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저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말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말”(루카 1, 20)을 잘 믿지 않는 나를 보면서, 반드시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자 내맡깁니다. |
다해 대림 제 3 주간 화요일./“때가 되면 이루어질 말” - 조성호 신부님
2006. 12. 19. 오전 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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